
1983년 공개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날이 바뀐 26일 새벽 3시, 그는 도쿄에 있던 연합군 사령관 겸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는 전속 부관에게 이 대통령은 호통을 쳤습니다.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 되느냐! 대신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놀란 부관에 의해 바로 맥아더 사령관과 전화가 연결되자 대통령은 무섭게 항의했습니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훈련을 받고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비행기가 없으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북한군의 거센 공세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맥아더와의 통화가 끝나자 대통령은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를 불렀습니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000만 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북한군은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택해 전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미국은 마침 토요일 오후 시간, 트루먼 대통령도 고향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워싱턴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는 사력을 다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국무성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접촉하고, 유엔 안보리 긴급이사회에 출석해 연설했습니다. 실로 그에게는 ‘한 시간이 일 년만큼이나 귀중’했습니다.
그리고 현지 시각 6월 26일 월요일 오후 3시 30분 장면 대사는 비로소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의 손에는 미국의 긴급원조를 요청하는 한국 대통령과 국회의 호소문이 들려 있었습니다. 훗날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대사가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눈물이 글썽해 사기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러나 면담을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장 대사의 태도는 의연했습니다. 결과를 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그는 결연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미군들이 우리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싸우는 것과 죽는 것은 우리가 맡을 것이다. 우리의 청년들은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벌써 수많은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 기간 도쿄의 연합군 사령부도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개전 닷새째인 6월 29일에는 맥아더 사령관이 중요 참모들과 함께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에 날아왔습니다. 전장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전황은 맥아더 장군 일행을 만나기 위해 대전에서 수원까지 이동하던 이 대통령과 무초 미국 대사가 탄 정찰기가 북한 야크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치고 맥아더 장군은 지프로 적의 코앞인 영등포까지 북상해 전선을 시찰했습니다. 참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장군은 근처 언덕에 올라 한강 남안 국군의 방어 진지에 북한 포병 부대가 대포와 박격포를 맹렬히 퍼붓고 있는 장면을 20여 분 가량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적의 수중에 들어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서울 시내, 시뻘건 한강, 다리를 끌며 퇴각하는 부상병들의 모습… 그때 그는 그곳에서 미국의 지상 전투부대가 투입돼야만 한국을 구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귀임한 다음 날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전에 미 지상 전투부대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지급전보 형식으로 국방성에 보냅니다. 이 보고는 바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제한된 지상군 투입을 재가했습니다. “새로운 전쟁을 두려워해 개입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나라가 한국처럼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7월 1일 미 제24사단의 선발부대가 부산에 도착했고 7월 5일에는 딘 소장이 이끄는 미 2사단 병력 전원이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나아가 7월 7일에는 유엔이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 지휘 하에 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을 편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쟁 발발 6일 만에 이루어진 미국의 신속한 참전 결정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군사학자들은 “없어질 뻔했던 나라가 살아남는 전기”가 됐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미국의 개입은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이어지고 이후 한반도 평화와 한국 경제 성장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해 6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전쟁의 대재난 속에서도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이렇게 붙들고 계셨습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