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은 안디옥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모술의 군주 카르부카가 재빨리 병력을 이끌고 성을 포위하면서 십자군은 도리어 성안에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지속되는 공성전으로 인해 보급품이 바닥나자 혼란에 빠진 병사들 가운데 탈영병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오던 동로마제국의 알렉시오스 황제가 십자군이 전멸했다는 탈영병의 말에 어처구니없이 회군해버리면서 십자군은 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한 사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안드레를 영접했다며 성당의 흙더미를 지목했고 그곳에서 작은 쇠붙이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사제는 이 쇠붙이가 롱기누스의 창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롱기누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의 이름이며 그의 창은 예수의 몸에 닿은 성스러운 유물로 알려져 있었다. 롱기누스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랜 굶주림과 죽음의 위기에 지쳐있던 십자군 병사들의 가슴에 광적인 신앙심이 불타올랐다. 성물로 인해 사기가 충천한 십자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기습적으로 안디옥 성의 문을 열고 나와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때 하늘에서 세 명의 성인이 나타나 이들의 공격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기록처럼 당시 십자군의 공격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안디옥을 둘러싸고 있었던 군주 카르부카의 병력들은 당황한 나머지 승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대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위기를 벗어난 십자군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확신했고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1098년 가을 전열을 정비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해 남하를 시작했다. 더이상 동로마제국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날 때 앞으로 적진에서 점령하게 될 모든 영지를 동로마 황제였던 알렉시오스에게 넘기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면서 보에몽이 안디옥을 차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려하던 상황과는 달리 팔레스틴의 해안 도시의 영주들은 남하하는 십자군을 열렬히 환대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7세기 중엽부터 이어져 온 이슬람 세력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크게 두 그룹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창시자이며 예언자이고 최고 지도자였던 무함마드가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인한 갈등이 근본 원인이었다. 선거에 의해 최고 지도자(칼리프)를 뽑으려는 세력(수니파)에 대항해 무함마드의 가계를 중심으로 지도자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세력(시아파)으로 갈라져 있었다. 동로마제국의 턱밑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대치하고 있었던 셀주크 제국은 수니파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이 십자군과의 전투로 경황이 없던 상황에서 북아프리카 및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시아파 파티마 왕국이 기습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는 것이 셀주크 제국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니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기습적으로 예루살렘을 빼앗아 간 시아파를 공격하러 진군하는 십자군을 가로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가운데 만나게 된 수많은 도시들이 식량까지 지원하며 십자군에게 길을 터주었고 1차 십자군은 1099년 6월 7일, 서로마제국을 떠난 지 약 3년 만에 5000㎞가 넘는 대장정을 거쳐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김형건 목사(관악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