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2년 조선 왕조가 한양 천도를 단행한 이래 630여 년간 서울은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무대였습니다. 그 결과 도시 인근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역사적 유적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이화장’(梨花莊)이 한 예입니다. 평범한 주택가 속에 자리 잡은 이곳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私邸)로서 2009년 4월 사적 제497호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그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망명지 미국으로부터 귀국했을 때 당장 머무를 곳이 없음을 알고 주변 인사들이 급히 마련해 기증한 집이었습니다.
‘이화장’은 1455평 면적에 조각당(組閣堂), 전시관이 있는 안채, 별채, 새로 지은 살림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각당’은 대한민국 첫 내각 구성 작업이 이루어진 뜻깊은 장소입니다. 현재는 안전시설 설치와 전시관 신축 공사 등으로 개방되지 않고 있지만 경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이 소박한 ㄱ자형 건물 앞에 서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푸른 꿈을 안고 성안(成案)과 번복을 거듭했을 당대 지도자들의 분망함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당시 자료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인선에 국민의 기대가 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씨가 기거하고 있던 이화장의 조각 본부에는 아침저녁 정계 요인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신문기자들도 날카로운 신경으로 조각 본부에 몰려들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새 정부 국무총리 후보로 한덕수 전 총리를 지명했습니다. 경제부총리 등 각부 장관 후보자 인선 결과들도 뒤이어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화장의 ‘조각당’ 시절로부터 74년의 제법 긴 시간이 흘렀지만 새 내각 구성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대통령이 나라 경영의 총책임자라면 각료는 국정운영에 큰 역할을 해야 할 주축들입니다. 이런 요직에 어떤 사람을 기용하느냐를 보면 향후 5년의 정부 운용 기조와 철학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선인 대변인은 “유능함과 실력, 전문성이 인사의 기준”이라며 능력 우선의 인선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10여 명의 검증팀이 후보자에게 요청해 받은 자료를 토대로 “현미경 사전검증”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에게는 또 한 번의 검증 관문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국회 인사청문회’입니다. 여기에서 정책수행 능력과 개인신상 관련 검증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검증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진솔한 자기 점검과 마음의 다짐입니다.
우선 이번 인사의 기준이라 알려진 ‘실력’이 단순히 ‘지식’ 차원에 머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의 영역까지를 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선 중기의 두 재상 ‘오리 이원익’과 ‘서애 류성룡’에 관한 일화는 깨우침을 줍니다.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서애는 분명하고 정확해서 빈틈이 없고, 오리는 너그럽고 부드러워 인심을 얻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리가 타계한 뒤 효종은 그를 추모하면서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沛然)히 여유가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이런 외유내강의 자세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새 장관 후보자들은 ‘전문성’과 함께 대국을 보는 ‘통찰력’을 더불어 갖춰야 할 것입니다. 장관은 ‘행정각부의 장’ 이전에 국무회의를 구성하는 ‘국무위원’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의장인 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총괄해 심의하는 핵심기구입니다. 따라서 장관은 맡은 부서의 책임자로서의 전문성 못지않게 국정 전반을 포괄하는 대승적 안목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장관 후보자는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는 변하고 정권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물결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도도히 흘러갑니다. 잠시의 영달에 들뜨지 않고 초심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귀와 시선이 임명권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국민 앞에서 언제나 겸손함을 견지하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장관들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는 세종 연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천 년 우리 역사의 최전성기”를 연 세종 대왕의 리더십 요체를 찾기 위해 진력해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세종처럼』 개정판 서문에서 세종 시대 태평성대의 비결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평범한 백성들이 매일매일 비범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려는 세종과 그의 신료들의 고뇌와 결단.”
이런 시대를 만들어 가는 장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