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
조직신학의 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속성과 사역에 관한 신학적 접근과 이해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이에 반에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신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모욕"으로 치부하기도 했다(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 6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규정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며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분인지 그의 속성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신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차이점이 있다. 이 말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다만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한 것과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신약시대 기독교인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 구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대표하는 말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함과 동시에 전적인 차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거룩의 집약체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흔들리는 법궤를 잡았다가 죽은 웃사의 이야기(삼하 6:1~7)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에 근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재 속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민수기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민 23:19)라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아도나이)이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구원 사역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 신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거룩'이라면 신약의 하나님 이해는 '사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구약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신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4:8, 16). 또한 구약의 거룩하고 죄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전능자 하나님은 신약에서 '아빠,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다(롬 8:15).
이런 '하나님 이해'의 전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인간을 심판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빌 2:6~8).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되었으며, 주인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의 '아빠, 아버지'가 되셨다. 신약과 구약의 성서적 '하나님 이해' 외에도 교부와 중세시대는 물론 현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 이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 교부와 중세시대의 '하나님 이해'
교부들은 이성과 논리를 통한 철학적 신학적 '하나님 이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저스틴(Justin, 100~165)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분'이라고 규정했으며, 클레멘트(Clement, 150~215)는 하나님은 '증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하나님을 '최초의 원인'(causa prima), '순수한 현실'(actus purus)이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하나님은 진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은총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이해했다. 이 말은 무서움과 파괴적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불타는 화로'이며 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은 하나님을 율법과 복음의 이중적 인식론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율법은 하나님의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는 활동이고, 복음은 고유한 본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나 본질로 보지 않고 사랑인 하나님에게 따라오는 불가피한 그림자로 이해했다.
2.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론(Erroneous Theories about God)
하나님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접근 방법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들이 무신론(ath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유물론(materialism), 범신론(pantheism), 이원론(dualism), 다신론(polytheism), 이신론(deism) 등이다.
1) 무신론(atheism)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무신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철학적 무신론이다. 니체(F.W. Nietzsche)가 말한 '신은 죽었다'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실존론적 무신론이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2) 불가지론(agnosticism)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기독교적 사고 같으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9).
3) 유물론(materialism)과 이원론(dualism)
유물론은 영(spirit)과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 자체를 부인한다. 모든 영적인 현상은 뇌의 작용일 뿐이고, 유물론자들에게 죄는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이원론은 영과 물질의 영역을 구분하고, 모든 물질은 악하고 오직 영만이 선하다고 믿는다.
4)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이신론(deism)
다신론과 범신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신론은 '많음'을 의미하는 'poly'와 '신(神)'을 의미하는 'theos'가 합쳐진 헬라어 합성어로서 많은 신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범신론은 힌두교와 같이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동일시하는 사상으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전능자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지만 피조물을 유기했으며 더 이상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의 본질과 속성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