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용서는 억울함, 원한,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말했다. “원한을 품고 사는 것은 독약을 먹으면서 원수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과거의 상처는 바꿀 수 없지만 용서는 오늘의 나를 달라지게 한다. 더는 과거의 희생자가 되지 말자. 미국 루터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인 라이맨 T. 런딘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권리가 없는데 용서는 미래를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보석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용서를 실천해 보자.
1. 상대방이 나에게 한 잘못을 직면하자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다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말로 넘어가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거나 실수가 아니라 ‘죄’라고 콕 집어 말씀하셨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짓는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비유에도 빚의 액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용서가 가능해지려면 그 사람이 나에게 빚진 것이 얼마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잘못했고 그로 인해 나는 어떤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었는지를 직면해야 한다.
2. 잘못에 대해 갚을 것이 없다고 선언하자
죄를 짓는다는 것은 빚을 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종류에 따라서 그것은 인격, 신체, 재산에 손해를 끼친 것이다. 물론 전부 다일 수도 있다. 만약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빚이 된다. 일종의 채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채무 관계를 청산해 주는 것이 용서다. 사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에는 채권자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용서의 핵심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은 나에게 상처 준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안다고 해도 사과는커녕 뉘우치는 기색조차 없을 수 있다. 상대방은 관심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즉 상대방이 사과할 의사도 없고 아니 사과는 고사하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를 때에도 용서가 가능할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여전히 죄인일 때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말이다. 우리가 빌든 안 빌든, 잘못했다고 고백하든 안 하든 그 이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만약 내게 잘못한 그 사람이 와서 빌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고 치자. 그러고 나서 용서한다면 그게 진정한 용서일 수 있을까? 내 삶의 주도권을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3. 내 마음의 감옥에서 그를 출소시키자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정죄하고 처벌해서 내 마음속 분노의 감옥에 가둬 두면 정작 그 감옥에 갇히게 되는 사람은 나다. 갚을 게 없다고 선언하고 풀어 줘야 마음의 법정에서 재판이 끝나고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약 그를 내 마음속 감옥에 가둔 채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마음의 법정에 불러들여 정죄를 계속한다면? 정작 괴로운 사람은 누구일까? 송사에 휘말려 재판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가해자든 피해자든 재판 과정은 힘든 것이다. 더욱이 피해자로 사는 게 그렇게 행복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감옥에서 풀어 준다는 의미는 더는 그를 죄인 취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서 용납하는 것이다. “나한테 잘못했으니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라는 판결문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말 그대로 은혜 곧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값어치가 없어서 값없이 주신 게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어서 값없이 주신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 삶은 그 값어치를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사느냐가 보여 준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으로 세상에 드러나려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한 만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우리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님의 도움은 우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고도 남을 효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님의 도움이 우리 삶에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려면 구원받기 전과는 다른 선택을 우리가 해야 한다. 용서하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