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던 제후들은 황제의 파문을 확정하고 새 국왕을 선출했다(1077년 3월). 하지만 교회의 지지를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반란 세력을 제압하고 독일을 평정할 수 있었다(1080년 6월).

실질적 패권을 되찾은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 7세의 교황직 폐위를 결정하고 귀베르트(클레멘스 3세)를 새로운 교황(대립교황)으로 선포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를 제거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고(1081년 4월)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함락시켰다. 그레고리 7세는 간신히 피신하여 로마인들에겐 야만족으로 여겨지고 있던 노르만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노르만족의 개입으로 하인리히 4세는 퇴각했지만 오히려 구원군으로 불러들인 노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었다. 로마 시민들의 분노와 원망은 고스란히 그레고리 7세를 향하게 되었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피신한 후 결국 그곳에서 사망했다(1085년 5월).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촉발된 대립은 이렇게 황제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에 의해 대립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3세는 끝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추기경단에 의해 쫓겨났으며 그레고리 7세의 뒤를 이어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빅토르 3세가 교황이 되었다(1086년 5월). 또한 1년 남짓한 짧은 임기로 사망한 빅토르 3세의 뒤를 이어 정통 교황으로 임명된 우르바노 2세는 클레멘스 3세가 장악하고 있던 로마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고 선임이었던 그레고리 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서임권에 대한 교회의 주도권을 지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그는 교황의 실추된 위상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는 등 황제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그는 이런 여세를 몰아 클레멘스 3세를 밀어내고 교황으로 선출된 지 7년 만에 로마 입성에 성공했다(1095년). 한편 하인리히 4세는 둘째 아들(하인리히 5세)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 중에 갑작스레 병사하고 말았다(1106년 8월).

서임권 다툼의 최종적 타결은 1122년 9월의 일이었다.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스투스 2세 사이에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앞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에게는 세속적인 임무와 성직의 임무가 구분되어야 한다. 황제는 성직자의 상징인 반지와 지팡이로 서임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자유로운 선출을 교회에 이관할 것을 약속한다. 반면 교황은 국왕에게 충성과 일정한 봉사를 대가로 각종의 특권을 부여하여 주교와 수도원장을 자기 제후로 임명하는 권리를 인정한다.”

이러한 정교협약을 통해 성직 임명이 교회에 일임되었으나 황제 역시 고위 성직을 어느 정도 자기 뜻에 맞게 임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반대로 교황은 교회의 일에 관해서 만큼은 황제의 관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고위성직자는 국왕과 황제 양측으로부터 거부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추천되기 시작했고 교회로부터 성직 서임을 받고 국왕으로부터 토지와 영주권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유럽의 성직 운용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관악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