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타락과 부패<3> - 도색정치
이 시기의 교황들은 로마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그 배후에 있던 가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교황 선출을 둘러싼 권모술수가 만연했고 특히 성직자의 결혼이나 연애 문제에 대한 정확한 규율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들의 치맛바람에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세르기우스 3세(904년 즉위)부터 요한 12세(963년 사망)까지 이어졌는데 이 기간을 가리켜 ‘도색정치’(포로노크라시)라고 일컫는다.
우유부단했던 세르기우스 3세는 로마 원로원의 집정관이었던 테오필락투스 백작과 그의 아내 테오도라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세르기우스 3세가 죽은 뒤 교황직에 오른 세 명(아나스타시우스 3세, 란도, 요한 10세) 역시 모두 테오도라가 세운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군사적 재능과 용기가 있었던 요한 10세는 사라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업적을 세웠지만 곧바로 궁지에 몰렸다.
이 시기는 로마에서 영주들이 교황청과 그 뒤에 있던 귀족 족벌 체제를 대항하여 우위를 차지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특별히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요한 10세를 못마땅해 했던 마로치아와 그녀의 남편 알베리쿠스 1세가 권력을 잡자 요한 10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그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마로치아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 요한 11세를 교황좌에 앉히고 자신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를 넘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비참하게도 자신의 둘째 아들 알베릭에 의해 제거되었다.
알베릭 사망 1년 후 요한 12세가 교황이 되었다. 그는 돈을 받고 열 살짜리 소년을 주교로 임명하는 한편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는 한 사제의 사지를 절단했으며 살인과 간음을 자행했다. 결국 그는 ‘죄악의 괴물’이라는 오명을 얻은 채 교황직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만행으로 요한 12세는 당시 독일의 오토 대제의 미움을 받았다. 오토 1세는 요한과 같은 자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데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오토 대제는 황제의 허락 없이 아무도 교황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칙령을 반포하고 요한 12세를 퇴출시킴으로써 수치스러운 교황청 도색정치를 종결했다. 이러한 상황은 1074년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 교황으로 하여금 모든 성직자들의 독신을 규범으로 선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도색정치가 끝이 나면서 교황제도 안정을 되찾았다. 오토 대제의 사후 그의 권좌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그의 뜻을 이어서 교황청을 보호했다. 오토 대제의 손자였던 오토 3세는 독일인이었던 자신의 사촌형을 교황에 임명했는데 그가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 5세이다. 그러나 오토 3세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교황좌는 다시 이태리 귀족들의 정치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교황의 자리를 놓고 이태리의 두 가문(크레센티가와 투스쿨룸가)이 다툼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크레센티가에 의해서 세 명(요한 17세, 요한 18세, 세르기우스 4세)이 차례로 교황에 올랐으나 이후에는 투스쿨룸가의 후원을 받는 세 명(베네딕트 8세, 요한 19세, 베네딕트 9세)이 차례로 교황좌에 앉았다. 베네딕트 9세는 1045년 교황의 자리를 돈을 받고 팔아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했다. 교황좌를 돈을 주고 매입한 사람은 베네딕트 9세의 대부였으며 그는 그레고리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네딕트 9세가 교황의 자리를 판 것은 잘못이라며 자신이 다시 교황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레센티가에서도 다른 교황을 한 명(실베스터 3세) 내세웠고 이로 인해 갑자기 교황이 세 명이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동작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