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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가을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칠십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 (오민석 작사 신재동 작곡 송해 노래 <유랑청춘> 중)  

이 노래를 부른 송해 선생은 금년 94세입니다. 국내 최고령 연예인이며 방송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황해도 재령 출신의 실향민입니다. 스물세 살 때였던 1950년 12월 3일 북한군의 공세를 피해 잠시 피신할 요량으로 집을 나서던 날, 어머니는 예감이 이상했던지 "이번에는, 조심하거라" 당부하며 막내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지막 애절한 음성을 잊지 않으려 기를 쓰며 지난 70년을 살아왔습니다.

앞에 소개한 <유랑청춘>도 송해 씨의 데뷔 60년이 되던 2014년, 가까운 지인들이 시를 짓고 곡을 붙여 헌정한 사모곡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송해 씨는 KBS '전국노래자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987년 경북 성주 편에서 첫 사회를 맡은 이후 34년간 줄곧 이 프로그램의 MC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방송을 위해 그간 국내외 2000여 곳을 방문했고, 만 3세부터 115세까지의 3만여 명 넘는 다양한 출연자들을 만났습니다. 국토의 최북단 백령도에서 남단 흑산도까지를 순회했고 미국, 일본, 중국, 파라과이, 마침내 평양까지 다녀온 '국민MC'지만 송해 씨에게는 아직도 놓지 못하는 한 가지 희망의 끈이 있습니다. 그의 고향 재령에서 자신의 옛 이름으로 오프닝 멘트를 하는 것입니다. "고향에 계신 여러분 복희가 왔습니다! 전국~노래자랑~!"

언젠가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고백한 바 있습니다. "갈망하고 갈망한 나머지 잠을 자다가 잠꼬대처럼 이 말을 외친 적도 있다"고. "꼭 이걸 하고 떠나고 싶다"고. 자신의 나이를 가늠하며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마음을 추스르면서 각오를 다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비단 송해 씨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초래된 남북 분단과 후의 6·25전쟁은 이 땅에 '1000만 이산가족'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가족의 생사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원칙적으로 헤어진 가족의 상봉은 인간의 기본권에 속합니다. 실제로 <세계인권선언>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사생활, 가족, 가정 또는 통신에 대한 전반적인 간섭이나 침해를 받지 아니하며 그러한 간섭이나 침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12조)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국을 포함한 여하한 국가로부터 퇴거하고 또한 자국에 귀향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해 고향에 돌아갈 권리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1960년대 한반도의 상황은 이산가족 문제를 다룰 여건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족 상봉 문제가 남북관계 현안의 하나로 제기될 수 있었습니다. 즉 1971년 우리 정부는 대한적십자사를 창구로 북한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제안했습니다.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의 실태를 파악하고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 찾기 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혈육 간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1985년 9월에 와서야 실현됐습니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시범 교류를 통해 남측은 35명, 북측은 30명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당사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달리 가족 상봉은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남북관계와 국제정세의 변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결과 첫 제안이 나온 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봉 횟수는 28회(대면 21회, 화상 7회)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13만 3530명) 중 사망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지난 8월 31일 기준 생존자는 4만 7318명(35%)인데 특히 이 가운데 80대 이상 고령자가  66.1%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는 42만명의 이산 1세대가 사라지면 해결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세는 사안의 시급성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남북당국과 사회 전반의 소극적 대처 속에 천금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이산가족 상봉이 더 이상 국내외 정치 환경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정례화, 제도화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동서독 간의 교류 협정을 토대로 가족 친지들의 상호 방문은 물론 1년에 30일 혹은 60일의 체류까지 허용했던 통일 이전 독일의 경우는 부러운 사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 한 번의 가을을 맞았습니다. 그리운 사람들이 새삼 떠오르는 계절입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고착화된 분단체제의 희생자들이 돼 눈에 밟히는 고향을 70년 넘게 못 가고 있는 애절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1985년 9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이산가족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누이와 극적인 상봉을 했던 남동생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누님과 헤어질 때, 보름날이면 달을 보며 서로 생각하면서 살자고 약속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주님께서는 "울고 있는 사람들과 울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가을을 맞고, 머지않아 또 한 해가 흘러갈 것입니다. 변함없이 떠오른 청명한 가을달을 보며 이산가족들의 첩첩이 쌓인 망향의 아픔을 함께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기사입력 : 2021.10.17. am 08:53 (편집)
김성동 장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