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센조약과 노르망디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한 로타르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던 855년 9월 19일 자신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장자였던 루드비히 2세(경건왕 루드비히의 세 아들 중 동프랑크 왕국을 차지한 루드비히 2세와 구별할 것)는 황제의 칭호와 함께 이탈리아 지역을, 차남이었던 로타르 2세는 제국의 북쪽 지역을, 막내이자 '뚱보'라는 별칭으로 불린 칼은 프로방스 지방과 부르군트 지방의 큰 부분(오늘날 프랑스의 중심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875년 로타르 2세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삼촌들인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칼과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로타르의 아들 루드비히 2세와 구별할 것)가 로타르 2세의 영토를 침략했고 이를 분할하여 통치하자는 메르센조약(870년)을 체결했다. 대머리 칼은 로타르의 장자 루드비히 2세가 죽은 후에 그의 영토였던 이탈리아까지 차지했으며 교황 요하네스 8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을 받았다.
대머리 칼이 차지한 황제의 칭호는 877년 그가 죽은 후 동프랑크 왕국의 뚱보 칼에게 넘어갔으며 그 후 다시 이태리 소왕국의 왕들을 거쳐 915년 이태리의 베렝거에게 주어진 후 독일의 오토 대제가 962년 로마에서 교황의 대관식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될 때까지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과 내적인 분열이라는 문제 해결에 바빴던 각 지역의 왕들에게 황제라는 직함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외부 종족들의 침략까지 프랑크 왕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마자르족이 헝가리로 진출하여 그곳에 거주하던 아바르족과 합류, 동프랑크 지역인 바이에른을 노략질했다(900년). 이러한 약탈은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프랑스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한 7세기 이후 잠잠하던 이슬람(사라센 제국)의 침략이 재개되었다. 아프리카에 자리 잡고 있던 이슬람은 시칠리아, 코르시카를 점령했고 이태리 중부까지 진격해 로마를 위험에 빠트렸다. 비록 이들은 915년 비잔틴 제국의 반격으로 이태리 본토에서 퇴각했으나 시칠리아는 한 세기 가량이나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 하나의 강력한 침입자는 바이킹족이라고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침략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바이킹족은 9세기가 되면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으로 재편되었는데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바이킹족은 서유럽을, 스웨덴의 바이킹족은 동유럽을 강타했다.
이들의 공격대상은 수도원과 교회가 우선이었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의 문화유산은 물론 막대한 부가 축적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농촌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이 와해되어 가고 있던 이 시기에 바이킹족의 침입은 커다란 난제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협상을 통해 이들을 일정 지역에 거주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바이킹족의 침입이 차단되었고 점차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확장되었다. 그들이 차지하게 된 왕국의 북쪽은 북쪽사람들(야만인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노르망디'로 불리게 되었다.
김형건 목사(동작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