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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4·19

백범 김구 선생은 1947년 12월 발표한 글 『나의 소원』에서 본인이 소망하는 나라의 모습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 백범은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선각자적 탁견이 돋보이는 말씀입니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은 백범 선생께서 소원했던 '정신적 영향을 온 세계에 널리 끼친' 실례가 될 것입니다. 4월 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고, 전 세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됐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헌법은 모든 국법의 모법(母法)으로 국가의 기틀이자 기반입니다. 특히 헌법 전문(前文)은 국가의 이념과 이상을 내외에 밝히는 엄숙한 가치 규범입니다. 4·19혁명은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함께 명기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사회의 4·19혁명에 대한 지식과 인식은 매우 빈약한 실정입니다.

되짚어 보면 혁명이 일어난 1960년 4월,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12년차의 신생국이었습니다. 더욱이 3년간의 6·25 한국전쟁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실로 희망의 싹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폐허와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1인 독재로 치달았습니다. 남북 분단, 경제적 극빈, 사회적 불안이 그 토양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1954년 11월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변칙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이를 통해 종신대통령의 길이 열린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4선에 도전했습니다. 누적된 실정과 반민주적 독재정치로 국민의 반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여러모로 무리한 출마였습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야당 후보가 급서함으로써 사실상 일찌감치 그의 당선은 확정됐습니다.  

문제는 동시에 실시된 부통령 선거였습니다. 85세의 고령인 대통령의 정치적, 법적 후계자 지위를 노리고 여당은 이기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했습니다.

선거 후에 밝혀진 조사기록에는 '무수한 유령 유권자 조작, 야당 선거운동원에 대한 폭행 탄압, 경찰 등에 의한 공포 분위기 조성, 기권 강요와 대리 투표, 3인조 투표를 통한 상호 감시, 40% 사전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광범위한 불법 사례들이 적시되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이러한 1인 장기집권과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민심의 대폭발이었습니다.

선거 전후 수주일 동안 지방 도시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4월 16일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해상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4월 19일 서울에서 3만명이 넘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정부퇴진' '선거 재실시'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중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를 향해 행진하던 일부 시위대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144명의 사망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출동한 계엄군은 실탄 발사를 억제하고 정부와 시위대 사이의 중재자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4월 25일 서울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하야와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제자들의 피를 헛되게 하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채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 26일,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고 정·부통령선거는 다시 하겠다"는 담화 발표 후 사임했습니다. 그는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로 4·19학생혁명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재확인한 위대한 '민권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 중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는 '근대화' '산업화' '정보화'를 초단기간에 달성한 경제의 '압축성장'에 경탄합니다.

그런데 이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헌정사는 험난한 역사의 굽이굽이를 넘어왔습니다. 건국 직후의 좌·우 이념투쟁, 6·25 한국전쟁, 1인 장기집권과 학생혁명, 군사변란과 군부통치, 유신과 전체주의, 시민항쟁과 민주화 등 위기와 난관들을 돌파했습니다. 다른 민주 국가들이 수백 년에 걸쳐 겪은 격변의 소용돌이를 압축해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역사의 전개 속에는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삭풍이 몰아치는 민주광장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명을 바친 선진들의 고귀한 희생이 밀알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북악산 자락 서울 수유동에는 '국립 4·19민주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 기념비의 비문은 이렇게 맺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진정 그렇습니까? 다시 맞은 61주년 4·19! 우리는 목숨을 바쳐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 시대를 연 그분들의 헌신을 되살려 기억하고 있습니까? 행여 갈수록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기사입력 : 2021.04.18. am 09:54 (편집)
김성동 장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