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의 시작

랑고바르덴을 몰아내고 차지한 영토를 증여한 피핀(난쟁이 피핀 3세)에 대한 답례로 스테판 2세 교황은 754년 직접 프랑크 왕국을 방문해 성 데니스 수도원에서 피핀과 그의 두 아들에게 다시  한 번 기름을 부으며 왕권을 인정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는 쿠데타로 차지한 왕권을 신성한 교회가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부터 왕의 정통성은 교회의 인가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교회는 세속권력과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벌이게 되었다.

768년 피핀이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첫째 아들인 칼만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칼 대제(프랑스식-샤를마뉴, 독일식-칼 대제)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아갔다. 774년 그는 교황을 도와 랑고바르덴 왕국을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덴의 왕이 되었으며, 788년에는 바이에른을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다. 그 결과 당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 해당하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칼 대제의 이름은 당시 지중해 모든 세계에 알려졌다.

한편 754년 피핀이 선물한 땅을 소유하게 된 로마 교황은 세속적인 영주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되었다. 교황령 안에서는 지역의 군주들도 교황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했다. 교황청의 직제 역시 성직체제가 아닌 통치를 위한 체제가 되어갔다. 교황령을 7구역으로 나눠 7명의 교황집사가 다스리도록 하는 한편 여러 직책을 두어 교황령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통치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유발했고 귀족들은 자식이나 친족을 교황에 앉히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다. 피핀의 도움을 끌어낸 스테판 2세 이후 교황들 아래에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던 중 스테판 4세의 뒤를 이어 하드리안 1세(772~795)는 계속되는 랑고바르덴의 침략의 위협에 대해 칼 대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칼 대제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왔다. 그는 랑고바르덴의 수도 파비아를 곧바로 함락시켰고 그들의 왕 데지데리우스를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칼 대제는 아버지(난쟁이 피핀 3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교황과 교황령의 보호를 다시 한번 약속하면서 로마의 정치적 지도자임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던 로마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칼 대제는 이를 통해 기독교의 전파자요 수호자이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요컨대 교황청의 무기력과 타락 그리고 랑고바르덴이라는 위협 앞에 기독교는 칼 대제 및 프랑크 왕국과 결합되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칼 대제와 협력관계를 재확인한 교황 하드리안 1세의 뒤를 이어 레오 3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로마 귀족들과 일단의 타락한 성직자들은 새 교황을 납치해서 감금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교황을 선출하고자 했다. 탈출한 교황 레오 3세는 칼 대제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명령으로 재판이 소집되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레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베드로 사도의 후임인 로마 교구의 주교는 모든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아무에게도 재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복음서에 손을 얹고 자신의 무죄를 선서했다. 이것으로 재판은 끝났다. 이틀 후 크리스마스에 베드로 성당에서 레오 3세는 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며 ‘하나님에 의해 왕관을 받은 위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로마인들의 황제’로 선포했으니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었다.

김형건 목사(동작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