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와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 스틸리코'

서로마 제국을 멸망(476년)시킨 것은 서고트족이었다. 그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정확히 100년 전(376년) 훈족에 쫓겨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제국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제국의 동쪽을 맡고 있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이 제국 내 트라키아(현재 불가리아) 지방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지원 부족에 불만을 품은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아드리아노플(터키와 불가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도시)에서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며 제국의 쇠퇴에 불을 지폈다(378년). 이 전쟁에서 발렌스 황제와 로마의 주력군 3분의 2가 전사했다. 발렌스를 이어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밀려오는 고트족과 협정을 맺고 그들을 제국 내에 정착하도록 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395년) 이후 제국은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나누어 다스렸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카디우스,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가 초대 황제가 되었다. 고트족이 정착한 동로마의 황제였던 아르카디우스는 선제가 체결한 서고트족에 대한 지급금 약속을 어겼다. 이에 서고트족은 25세의 새로운 젊은 족장 알라리크를 위시해 반란을 일으켰다(396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들을 약탈했다.

 이 무렵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장인이자 후견인으로서 최고 군사령관이었던 스틸리코가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알라리크의 반란이 일어나자 동로마와 연합하여 서고트족 격퇴에 앞장섰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의 측근이었던 친위대 장관 루피누스의 계략으로 알라리크 제거는 실패했다.  동시대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에 의하면,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진군해오던 스틸리코는 그리스 북동부의 항구도시 데살로니카에서 연합군 병력을 해산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명령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아누스에 의하면 스틸리코는 '비겁한 바보'(루피누스)의 짓임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루피누스가 살해됐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알라리크는 혼란에 빠진 동로마 제국을 재침공했다. 그는 아테네 스파르타 고린도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스틸리코는 이번에도 알라리크를 저지시켰다. 알라리크는 계획을 바꾸어 에베소로 방향을 돌려 동로마 제국의 궁정과 협상(=협박)을 벌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마 제국에 속한 일리리쿰 일대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알라리크는 동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과 협상하여 자신의 군대를 증강시킬 수 있었다.

 406년에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이 라인 강을 넘어 로마제국의 서쪽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침입하고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로 향했다.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알라리크의 군대에 대가를 지불하고 동맹군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비록 적이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서고트와의 협상을 주도한 스틸리코가 모반 혐의로 암살당하면서 약속했던 배상금 지급이 결렬되자 분노한 알라리크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습격, 결국 410년 '신의 도시'로 불리던 로마를 점령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김형건 목사(동작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