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티케스논쟁(단성론)
네스토리우스와 키릴을 중심으로 일었던 신학적 소란은 에베소공의회(431)와 일치정식(433)의 완성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동방과 서방의 신학적 차이와 대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이 죽은 뒤(444년) 디오스코루스가 그의 뒤를 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집트의 새 파라오'라 불릴 만큼 인품에서나 신학에서나 부족함이 많았다. 주교좌를 이어받은 얼마 후 그는 본격적으로 433년의 일치정식을 전면부인하고 나섰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뒤를 이어 플라비아누스가 새 주교가 됐다. 이상하게도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이었던 유티케스는 플라비아누스가 아닌 이집트의 주교 디오스코루스를 지지하면서 433년 일치정식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2세)의 호의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했던 유티케스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플라비아누스 사이의 대립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플라비아누스는 동방의 여러 주교들의 원성과 고발을 근거로 유티케스를 교회회의(448년)에 호출하여 파문해버렸다. 당시 유티케스가 자신의 신앙을 항변하려 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일치하기 이전에는 두 본성이지만 일치한 뒤에는 하나의 본성이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결국 '하나의 본성'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소위 '단성론'(單性論)이라 일컫는다.
자신의 파문을 부당한 것으로 반박하기 위해 유티케스는 곧바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디오스코루스는 곧바로 그 콘스탄티노플 대수도원장의 편에 섰으나 로마의 주교 레오(1세)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유티케스 파문의 책임을 맡은 플라비아누스 주교의 소명을 기다릴 것을 제안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주교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한 번 에베소에 대대적인 교회회의(449년)를 소집했는데, 그렇게 중요한 회의의 의장에 디오스코루스를 임명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윽고 개최된 회의에서 유티케스가 복권된 것은 뻔한 수순이었다. 433년의 일치정식은 폐기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플라비아누스는 파문당했다. 참석한 주교들이 뒤늦게 디오스코루스에게 이용당한 것을 깨닫고 거세게 항의하면서 회의는 아수라장이 됐다. 당황한 디오스코루스는 황제의 방백들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명령으로 칼로 무장한 군인들과 이집트 수도승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결국 참석한 130명의 주교들 가운데 114명이 강압에 못이겨 플라비아누스를 단죄하는 데 서명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집트 측의 수도승들에 의해 플라비아누스가 사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로마교회 사절단들은 야음을 틈타 달아났고 레오 주교에게 모든 일을 보고했다. 크게 분노한 레오는 이 회의를 가리켜 '강도회의'라고 비난했다.
소식은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제국 곳곳으로부터 449년 강도회의에서 내린 결정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다. 로마교회의 주교 레오는 새로운 공의회를 서방에서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이 무렵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말에서 떨어져 죽자 사람들은 레오의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황제의 뒤를 이어 신앙이 깊었던 풀케리아 공주가 여왕이 됐다. 그녀는 어수선한 제국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황실에 가깝게 위치한 칼케돈이라는 도시에 교회회의를 소집했으니 이 회의가 바로 그리스도론논쟁의 종결을 알리게 되는 '칼케돈공의회'(451)였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