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 소환된 사람은 다름 아닌 베드로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세 ‘기둥’ 중 하나(갈 2:9)인 그가 청문회에 불려 나갔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행 10:28)인 상황에서 그가 그랬으니 예루살렘 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을 퍼붓기까지 했다(행 11:3). 이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행 11:1)라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이방인 집에 들어가 음식을 같이 먹었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프레임 씌우기’와 같았다.
베드로는 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간다. 사실 그의 증언은 사도행전 10장 내용의 재진술이었다. 같은 내용이 이렇게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은 이 사건이 틀림없는 사실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드로조차 그 즉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시는 성령의 ‘큰 그림’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먼저 그가 본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의 환상(행 10:10~16)에 대해서 서술한다(행 11:5~10). 그는 이 환상이 고넬료 집 구원 사건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이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한다. 그릇 안에 가득한 각종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하늘 음성에 대해 자신은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은 것’을 결코 먹은 적이 없다며 거부하자 다시금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것을 빼놓지 않고 설명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초월할 것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음식 규정을 초월하라고 그에게 명하신 것이었다!
음식 규정 초월도 어려웠던 베드로에게 인종 간의 구별을 초월하라는 말씀은 더더욱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명령을 듣고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떼어 고넬료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넬료의 집에 모여 앉은 이방인들에게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는데 바로 그때 “성령이 그들에게(= 이방인들)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120명의 유대인 성도들) 하신 것과 같이 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했다(행 11:17).
그때서야 베드로의 증언에 촉각을 세우며 듣던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함으로써 베드로의 고넬료 집 사역을 승인했다(행 11:18). 이로써 성령강림의 역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깨닫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고넬료 사건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신앙인에게도 기존에 있던 편견의 벽이 깨지지 않고 여전히 존속함을 보여준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매일 새롭게 창조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사 43:18~19)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나님과 성령의 창조적인 사역에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베드로 청문회’ 같은 것을 수없이 열어야 할 것이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