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흑사병을 통해 깨닫는 참 신앙인의 모습
14세기 유럽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것은 검은 죽음(The Black Death)이라고 불리는 흑사병이었다. 약 1억2300만 명이었던 당시 유럽의 인구가 흑사병이 휩쓸고 간 후 6500만 명으로 줄었으니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떨어진 원자 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약 30만 명)와 비교해 볼 때 흑사병의 위력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 흑사병의 발생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박테리아의 일종인 에르시니아 페스티스 세균(오늘날 페스트균)에 의해 감염되어 발생하는 병이었다. 감염된 쥐의 피를 빨아먹은 벼룩이 사람의 혈액을 빨면서 옮기거나 사람들 사이의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었다.페스트균은 사람의 몸속에서 대체로 2~6일간의 잠복기를 거친 후 주먹만 한 크기의 종기로 나타났다. 각혈이 이어지고 악취를 풍기면서 죽어갔다. 치사율은 거의 100%에 가까웠기에 사람들은 눈만 마주쳐도 죽는다고 생각했다.
2. 감염전파
당시 감염 경로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제일 유력한 설은 실크로드를 통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전파설이다. 즉, 13세기 중엽 몽골인들의 유럽 침공 이후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활동이 활발해졌던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으로 지목되는 크림반도 페오도시아의 카파 항구는 유럽과 이슬람 제국의 교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었다.1347년 이곳에서 이탈리아인에 의한 이슬람 상인의 살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빌미로 이슬람의 수호자라고 불리던 킵차크 칸국(오늘날 몽골)의 자니벡 칸이 몽골군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에워쌌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페스트균으로 인한 전염병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퇴각하게 된 몽골군은 악랄하게도 죽어 나간 병사들의 시신을 투석기를 이용해서 성안으로 쏘아 올렸다. 페오도시아 시민들은 시체를 처리했지만 감염을 피할 수는 없었다.특히 카파 항구는 동양으로부터 온 향료나 실크 등을 유럽으로 들여가는 중요 교역로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제 흑사병이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3. 전염병이 발생할 수 밖에 없던 상황
사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아니더라도 여러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4세기는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연평균 기온이 하락했던 시기로서 대기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영양실조에 이른 사람이 허다했다. 게다가 과학적인 위생 개념이나 위생 규정도 없던 당시 유럽에서 결핵이나 홍역과 같이 오늘날 얼마든지 치료 가능한 질병들조차 사람들에겐 공포스러운 전염병이었다.
상당한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던 아랍인들과는 달리 유럽인들에게 의학 지침이라곤 2세기 로마 시대 갈레노스라는 의사의 치료법이 전부였다.해부가 금지되었던 로마 시대에서 인체 대신 동물들을 통해 쌓은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갈레노스의 의학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갈레노스는 살무사의 머리, 염소 똥, 시체 조각을 넣고 끓인 ‘만병통치약’을 만들었는데 황당하게도 이는 18세기까지 매우 중요한 약으로 통용됐다.그는 피를 뽑아 치료하는 사혈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혈액에 영혼이 깃들어 있기에 병든 사람의 피를 뽑아내면 치료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창궐한 흑사병은 언제 나타나도 이상할 것 없는 전염병이었다.
4. 흑사병과 로마 가톨릭
로마 가톨릭 아래 살던 사람들은 흑사병이 신이 내린 진노라고 확신했다. 그들에겐 오직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의 치료책이었다. 곳곳에서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당시 약 8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루에 3~4번씩 스스로에게 온갖 채찍질을 가하며 신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흑사병 앞에서 사람들의 마비된 이성은 점차 광기로 변해갔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는데 특별히 유대인이 선택되었다. 유대인들이 질병을 퍼뜨린다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을 향한 분노와 화풀이가 자행되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고 대학살도 수없이 발생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의 원인을 천문학에서 찾으려 했다. 천문학자들은 1341년 물병자리에 있는 세 행성인 토성과 목성 화성이 일직선으로 겹친 천체이변의 결과로 흑사병이 창궐했다고 주장했다. 희생자가 많아지면서 아비뇽에 더는 시신을 묻을 땅이 남지 않게 되자 교황은 론(Rhone)강을 축복하며 처리되지 않은 시신을 그냥 강물에 버리도록 했다.
또한 교황은 로마 교황청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흑사병이 창궐하던 1350년을 성년으로 앞당겨 선포하고 유럽 전역 가톨릭 신자들에게 로마를 순례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순례에 참여하다가 죽은 사람은 즉시 낙원에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부활절에 약 120만 명, 성령강림절엔 약 100만 명의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했고 흑사병을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5. 흑사병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 깨닫는 참 신앙인의 모습
중세 유럽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봉건귀족이 영토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반면, 서민들은 굶주림과 가난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켰다.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해졌고 기존의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력 부족은 당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절대적 위치에 있던 로마 가톨릭에 큰 타격을 주었다. 높아진 임금으로 인해 교회 소유의 영토에서 노동의무를 기피하는 성도들을 공개 파문하거나 엄벌에 처했다.
임종하는 신자들의 고해를 들어줄 사제의 수를 채우기 위해 자격이 모자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서품하는 등 부패하고 부조리한 모순들이 드러났다. 결국 15세기까지 반복된 흑사병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다양한 모순을 심화시켜 종교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위기 가운데 처해있다. 14세기 중세 흑사병이라는 재앙 속에서 비이성적인 신앙을 강요하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곁에 서지 못한 로마 가톨릭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지금의 위기 가운데 한국 교회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전염병이라는 재앙 가운데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오히려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더욱 힘쓰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