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 평생 십자가 사랑 실천한 목회자
여성으로서 기도원과 신유 운동 통해 한국 성령운동 이끌어
오직 하나님 영광 나타내며 살다간 33년 목회 외 길
‘할렐루야 아줌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립자이자 조용기 원로목사의 장모로 알려져 있는 최자실 목사. 최자실 목사는 1989년 11월 9일 천국에 가기까지 33년의 목회 가운데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는 사역, 금식기도와 신유기도, 기도원운동,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몸소 실천하며 십자가 사랑을 실현한 목회자였다. 또한 기도의 어머니로서 눈물 뿌린 금식기도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교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고 1960∼80년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부흥사, 영성가, 전도자로서 기도원 운동과 신유 운동을 통해 한국 성령운동을 주도했다.
최자실 목사는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최덕립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섯 살 때 돌아가셔서 매우 가난했고 가장을 잃은 어머니는 늘 노동과 삯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웠다. 최자실 목사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아프신 어머니,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어린 나이부터 죽음에 대해 인식했고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눈바람 속에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속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계기로 죽음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12세 때 친구로부터 ‘훌륭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최자실 목사는 이성봉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부흥회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명신여학교를 졸업한 최자실 목사는 평양도립병원 산파 간호사 양성소에서 수학 후 산파 간호사가 돼 신의주에서 일할 때는 한경직 목사가 담임한 ‘신의주 제2 장로교회’를 다녔다. 같은 교회를 다니던 세관 판인관 김창기와 결혼해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산파 주임으로도 승진했다.
이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분위기가 감돌자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가족들과 월남을 했다. 월남 후 최자실 목사는 서울에서 산파업을 하면서 성냥 공장과 비누 공장도 인수해 사업에 성공했다. 신당동 성결교회를 다니면서 초대 부인전도회장이 되어 교회를 섬겼다. 또한 대한민국독립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돼 김구 이승만 신익희 조서항 등과 함께 국민회의를 이끌어 대한민국의 산파 역할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최자실 목사는 남편이 군장교로 근무하는 경남 진해로 내려가 해군병원 통제부교회에 출석했고 그곳에서도 부인회장이 되어 섬겼다. 하지만 사업에 쫓겨 육지와 바다에서 바쁘게 일하는 통에 주일성수마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최자실 목사의 어머니는 눈물로 금식과 철야기도, 새벽기도로 딸이 온전히 신앙 생활하기를 호소했다. 그러던 중 최자실 목사에게 어머니와 맏딸의 죽음이라는 시련이 닥쳐왔고 최자실 목사는 삶의 소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큰 슬픔 속에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사업실패로 그 많던 재물은 사라지고 건강 악화까지 겹쳤다. 최자실 목사는 그동안 주님 일을 멀리하고 세상일에 골몰한 것을 회개했다.
너무나 괴로워 삼각산 골짜기로 찾아간 최자실 목사는 굶어 죽기로 결심하고 바위굴에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간청하던 중 그곳에서 30년 전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 친구의 강권으로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이성봉 목사와 재회했다. 부흥회에서 사흘 밤낮을 기도하던 최자실 목사는 성령 침례와 방언을 받았다. 이때 최자실 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성결교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는 방언을 하는 최자실 목사에게 선교사들이 세운 서대문순복음신학교에 입할 것을 추천했다. 그곳에서 최자실 목사는 1956년 동기인 조용기 목사를 만나 졸업 후 58년 불광동 천막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조용기 목사와 함께 개척했다.
최자실 목사는 평신도 때도 교회에서 부인회장을 도맡아 했었고 특히 사업의 경험은 리더십을 세우고 조직을 꾸리는데 큰 뒷받침이 됐다. 사업을 하면서 익힌 활발한 대인관계와 사회와의 친밀감으로 목회사역 초기부터 노방전도와 가정 방문을 했고 천막교회를 짓고 교회를 조직하여 여성 성도들을 리더로 세워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73년 순복음오산리기도원(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설립해 기도원 운동을 시작했고 정통 신학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에게 신유사역을 펼쳤다. 오산리금식기도원은 설립 될 때부터 초교파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찾아와 금식기도를 통한 치유와 성령 충만으로 온갖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의 동산이 됐다.
또한 이곳에서 전국적 대규모의 일반 성도, 지도자, 여성, 청년 등 다양한 금식기도대성회가 개최됐다. 최자실 목사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 기도원운동도 펼쳐 소천하던 해 미국 LA에 나성순복음교회 국제금식기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최자실 목사는 초대 한국교회 전도부인의 맥을 이어 온 여성 부흥사요, 전도자로도 꼽힌다. 여성들을 리더로 세워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을 외치며 노방전도에 힘썼다.
최자실 목사는 당시 여선교회장이었던 김선실 목사(이영훈 목사의 어머니) 등 보통 5∼6명의 여성 성도들과 함께 집집마다 심방을 하고 특별히 문제가 있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가 있는 집에 가서는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간절하게 기도를 드려 문제를 해결했다. 문제 있는 가정이 있으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달려가서 위로해주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또한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금식기도의 능력’ ‘우리의 소원은 전도’ 등 저서를 통해 문서선교를 했다. 최자실 목사는 가는 곳마다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쳤고 성령침례가 능력있는 신앙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했다.
1964년 일본순회선교여행을 시작으로 이후 대만, 미국, 캐나다, 독일 등을 순회 목회하면서 온 세계를 다니며 금식기도원 설립을 독려하고 주의 복음을 증거했다. 생전 최자실 목사는 이영훈 목사가 시무하던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자 “소련 모스크바, 중국 연변에 가서 복음증거하고 싶고, 평양 대동강 옆 모란봉에 교회를 짓고 싶고, 금강산 입구에 금식기도원을 세워 오고 가는 관광객이 들러 하루씩 쉬면서 금식하고 가게 하고 싶다”고 소원을 전하면서 “만일 내가 못가거들랑 여러분이 해주세요”라는 유언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자실 목사는 33년 주의 종의 길에서 천국가기까지 한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그저 주님만 바라보았다. 오직 주님 오시기를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다 살다 간 외길 인생이었다.
‘앉으나 서나 전도,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 냉수 마시고 속차리고,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 사나 죽으나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다’라는 최자실 목사가 늘 하던 말씀이 한 세대를 지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준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