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절대긍정 절대감사 절대순종
가정예배가 신앙생활의 기본 만들어
어릴 때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 이뤄져
신앙의 기본은 가정으로부터
선대로부터 4대째 신앙을 물려받은 이영훈 위임목사는 철저하게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 환경에서 신앙생활의 기본을 배웠다. 어린 시절 토요일이면 작은아버지 이경섭 장로는 상금을 걸고 이영훈 목사 형제들에게 성경 퀴즈를 냈다. 이영훈 목사는 퀴즈 참여를 위해 일주일 내내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벌써 성경의 주요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게 됐다.
조부는 신앙의 기본인 주일성수에 철저하라고 가르쳤다. 헌금으로 평소에는 만져볼 수도 없는 100환을 주시며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고, 주일에는 개인의 유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와 심지어 먹을 거리를 사 먹는 것도 금하며 오직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모든 열정과 시간을 드리도록 했다.
조부의 낙타 무릎 기도에서 배우다
이영훈 목사의 신앙 인생에 최대 전환점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64년 4월이다. 신앙에 철두철미한 조부는 새벽예배를 3개월간 서대문순복음교회에 출석 후 가족회의를 소집해 “이제부터는 순복음교회로 전 가족이 출석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침례와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조용기 목사의 속사포 같은 설교를 통해 어린 이영훈 목사는 성령을 사모하며 교회에서 열리는 모든 성회에 참석했다.
소년의 순수한 기도는 1966년 2월 응답됐다. 성령은 받은 그날부터 5년간 이영훈 목사는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났다고 회고한다.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해서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그는 중학생 때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미션스쿨인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다니며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업 도중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온 가족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던 그때 이영훈 목사는 광채가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은 죽음마저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평생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해 무릎이 온통 딱딱하게 굳어져 낙타 무릎처럼 됐다. 할아버지는 그 무릎의 기도로 가족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고 순복음 신앙에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절대긍정과 감사, 순종
이영훈 목사는 1977년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순복음의 정통신학을 배우기 위해 순복음신학교(현 한세대) 신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1978년 12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전도사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영산출판사의 편집부장, 순복음뉴스(현 순복음가족신문) 초대 편집장, 순복음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사역을 하다가 1982년 5월 목사안수를 받고 그해 7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2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 유학시절 이영훈 목사는 학교가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의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교회에는 70여 명의 성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이영훈 목사는 1000석 성전 건축의 비전을 선포하고 매일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91년 모든 역경을 딛고 하나님의 은혜로 3000평 부지에 성전을 건축했다. 조용기 목사를 모시고 헌당예배를 드린 후 1992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 조용기 목사는 이영훈 목사에게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이영훈 목사는 1993년 국제신학연구원장을 맡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 Ⅰ·Ⅱ’를 집필하는 등 순복음 신앙과 성령운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순복음 성령신학의 기반을 구축했다.
2000년 조용기 목사로부터 순복음동경교회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받고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 하자마자 열두광주리 특별새벽기도회를 열고 매일 눈물로 새벽 제단을 쌓은 결과, 부임 1년 반 만에 땅 한 평에 1억원이 넘는 동경 시내 한복판에 8층 규모의 성전을 헌당하고 일본 선교의 토대를 다졌다.
2003년 귀국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 2005년 LA나성순복음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됐다. 그리고 새벽기도 영성으로 교회 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결실을 얻었다.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의 자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김선실 목사가 물려준 신앙유산의 힘이었다.
이영훈 목사에게는 “항상 겸손해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님뿐이다”라고 당부를 이어갔다.
배우자는 최고의 신앙 동반자
이영훈 목사의 절대 순종의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백인자 사모의 조용한 내조와 헌신 덕분이었다. 이영훈 목사가 사역지를 옮겨 다니며 이삿짐을 일곱 번 쌌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백인자 사모는 이영훈 목사의 유학 시절부터 빠듯한 경제 상황 속에서도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조용히 인내했다. 이영훈 목사가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건축을 선포한 후 교회가 완공될 때까지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교인들에게 공표했는데 완공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조교로 일하던 백인자 사모는 생활비 등 아무 걱정 말고 목회에 전념하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후에 백인자 사모는 학위를 취득한 후 메릴랜드대학으로부터 연구원 보직을 받아 충분한 급여와 안정된 직장을 보장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역을 위해 미련 없이 접기도 했다.
이영훈 목사와 백인자 사모는 부부가 함께 하는 헌신과 순종을 통해 최고의 신앙 동반자가 되어 굳건하게 신앙의 명가를 이어나가고 있다. 결혼 17년 만에 낳은 딸 성은 양은 장성하여 미국 남부의 명문 에모리대학에 재학 중이다.


특별취재팀<자료제공=신앙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