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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 : 이영훈 목사] <1> 신앙 명문가의 태동과 기초

순복음가족신문은 이번 주부터 ‘신앙의 명가’코너를 신설하고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4대째 이어 내려온 믿음의 가문
선조의 신앙을 최고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후손들

선교사에게서 전수된 복음으로 신앙 명문가 초석 세워

한국의 초기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는 평양 신양리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8대 독자 이재식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청년 이재식은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 됐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직접 산에 올라가 도끼로 나무를 베어 교회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누구 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이 청년이 바로 이영훈 위임목사의 증조부 이재식 옹이다.

 증조부의 신앙은 고스란히 이영훈 목사의 조부 이원근 장로에게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9대 독자인  이원근 장로에게 다산과 번성의 복으로 채워주셨다. 이원근 장로는 문창화 권사와의 사이에 9남매(4남 5녀)를 얻는 복을 누렸다. 슬하의 9남매는 모두 신앙을 물려받았고 그 후손의 수가 총 135명에 이르렀다. 이 중 목사가 13명이고 나머지 가족은 장로 권사 집사 목사사모로 각각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원근 장로는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독립운동과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청년 김명선과 이원근에게 장학금과 미국 유학을 권했다. 제안에 따라 유학을 떠난 김명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생리학자이자 의사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세브란스 병원장으로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의 통합에 기여했다. 이원근 장로가 유학의 뜻을 밝히자 9대 독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걱정하며 슬피 우셨고 결국 효자인 이 장로는 유학을 포기한 대신 사업가가 되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원근 장로는 1919년 3월 황해도 장연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섰고 이로 인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일제의 신사참배와 경술국치를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공을 인정해 정부는 2016년 이원근 장로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고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이원근 장로

분단 전 평양에는 장대현교회와 서문밖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든든한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이원근 장로는 평양 서문밖교회의 장로였다. 유학을 포기하고 사업가가 된 이원근 장로는 일본에서 재봉틀을 수입해 평양을 비롯해 전국에 보급했다. 사업은 크게 번창해 이원근 장로는 평양시 미싱상 조합 이사장에 취임했다.

 어느 날 서문밖교회의 후배 장로이자 이 장로의 회계 담당이었던 강양욱(후에 북한서기장, 부주석이 된 인물)이 찾아왔다. “형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기 머무르시려면 공산당에 협조해야만 합니다. 형님은 대쪽같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공산당에 협조하실 리가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형님께 많은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보답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가족들을 데리고 속히 월남하십시오.”

 1948년 6월 이원근 장로는 오직 신앙 하나만을 붙들고 가족들과 월남했다. 이 장로는 통통배 하나를 빌려 가족들을 배 밑바닥에 숨기고 그 위에 생선 궤짝을 실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북한에 남겨놓고 입은 옷 한 벌에 가방 하나만 들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그 가방에 든 것은 ‘성경’과 ‘성경 주석서’ 뿐이었다.

 그 당시 월남한 기독교인들 중 남한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이원근 장로의 가족들은 영락교회 마당에 설치된 천막에 한달간 머무르며 혹독한 고생을 했다. 이원근 장로와 가족들은 눈물의 기도를 통해 암울한 현실을 축복으로 바꾸었다. 이 장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원효로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고 그곳에 남영동교회를 세워 월남한 교인들을 돌보았다.


목숨보다 귀중한 하나님의 명령

남한에서도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과 결단은 계속됐다. 제주에서 1948년 발생한 4·3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의 많은 교회들이 소실되었을 때의 일이다. 광주에 있던 미 남장로교회 파송의 타요한 선교사가 이원근 장로에게 제주의 교회 재건을 부탁했다.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원근 장로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표선과 남원교회를 재건했고 위미에 기도처를 세웠다. 또 제주 남원중학교를 인수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교육에도 앞장섰다. 제주도에서 2년 반 교회 사역을 마무리한 뒤에는 부산에서 한경직 목사를 도와 부산 영락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다. 이원근 장로는 장남인 이경화 장로(이영훈 목사의 큰아버지)를 불러 “교회와 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부산 영락교회와 고현봉 목사님을 잘 섬기거라”고 하셨고 이경화 장로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평생 이 교회를 섬겼다. 


성령의 음성 따라 신앙의 지경 확장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도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후 1964년 초 서대문에서 둘째 아들(이경선 장로)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평생 무릎 꿇고 기도하여 다리가 낙타의 무릎처럼 변한 이원근 장로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순복음중앙교회(여의도순복음교회 전신)로 새벽기도를 다녔고 3개월 후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 내가 3개월 동안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귀담아 들었다. 큰 은혜를 체험했다. 젊은 종인데 아주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말씀에 은혜가 넘친다”라고 말했다.

 성령을 좇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 이원근 장로는 결국 가족을 성령의 시대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순복음교회로 인도한 것이다. 1964년 4월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이영훈 목사는 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를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순복음교회에 정착했다. 

복순희 기자
<자료제공=신앙계>


 

기사입력 : 2019.03.17. am 11:26 (편집)
복순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