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1월 20일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3.1독립운동, 참여와 비판
당시 일본 기독지식인 중 3.1운동 부정자와 지지자 공존
의의 세계로 함께 이끌어가는 힘 우리 역사의 희망 여기 있어
3.1독립운동의 대의, 다 참여하였던가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사생결단의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세계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그 때 그 독립운동은 불가피하고 그 대의명분이 뚜렷했고 당당하고 또 적시적이었다.
따라서 일제 총독부나 동경의 일본정부 말고는 다 적극 참여하고 동조했다.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정은 달랐다.
3.1독립운동의 부정적 세력
기독교인이면 다 3.1독립운동에 동조 옹호하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정은 달랐다.
제암리사건을 일으킨 경기지역 헌병대장은 일본인 경성교회 장로 하세베 이와오 헌병대좌였다. 그는 제암리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중근신 15일에 처해졌다.
3.1독립운동 당시 그가 다니던 서울의 일본인 교회 뜰에 십자가가 여럿 세워진다. 그리고 군인 경찰들이 만세를 부르던 한국인 남녀 10여 명을 포박해 교회 뜰로 끌고 간다. 군경은 그곳에 십자가를 세우고 이들을 그 위에 달고는 앞뒤에서 독물을 뿌리고 몽둥이로 타격했다. 하필 왜 교회에 끌고 가서 그랬을까. 그런 참사가 그 교회의 허락 없이 자행될 수 있었을까. 교회 뜰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참혹한 죽임을 당한 이들을 바라본 일본 기독교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일본인 경성교회 목사 아키즈키는 3.1독립운동을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그의 한국 인식은 결국 식민총독부의 입장과 다름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비애를 느낀다. 그에게 한국의 독립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일본 기독교회의 반응
어차피 일본 교회의 반응은 일본적이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꽤 친한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3.1독립운동 때 세계가 문제 삼은 잔학 사건의 대부분은 날조에 불과하고 과장됐다고 핀잔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동조한 일본인 기독자가 몇 있었다. 가시와키 기엔이나 루터 연구로 유명한 사토 시게히코는 독립운동이 자생적 민족의식이나 민족자결이란 사상에서 나온 것이요, 결코 외부 세력이나 선교사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대의를 두둔하고 옹호했다. 우리는 다만 이들 한 두 사람의 기독자의 음성이 그 교회 양심의 등불로 꺼지지 않고 비추어져 있었음을 회고해 그 역사의 정통을 거기서 찾고 싶다.
누가 내편인가? 일제 안의 동조
구약 열왕기 시대에 예후가 이사벨이 있는 쪽을 향하여 외친다. “내 편에 설 자가 누구냐. 누구!” 정면 적대 대결 배후에서는 때로 적대와 우방의 구획선이 흩어질 때가 있다. 일본 안에 한국 독립운동 동조층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3.1운동 와중에 일본인들도 일부 서울 가두에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다가 60여 명이 붙잡혔다는 보고가 있다. 그들의 종교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이다. 3.1독립운동 격류 강변 저 멀리 눈에 띄는 한 청청한 소나무의 기개 같은 유쾌한 일화이다.
일본인으로서 3.1독립운동에 적극 응원한 이들 중에 당시 경성신문 ‘서울프레스’의 감독이던 도쿠도미 소호란 거물 일본 국수주의 학자가 있다. 그는 일본 군벌 수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절친한 친구이며 ‘일본국민사’를 100권 저술한 거대 일본 보수 황도파 학자이다. 당시 조선총독과 버금할 만한 대단한 일본 제국신민이었다. 그의 생각이나 처지로 보아서 조선총독부의 악정을 고발하고 일제군경의 야만적인 진압방법을 규탄하고 기사화한다는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란 이유 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는 ‘서울프레스’ 논설을 통해 10여 차례 일본 군경의 잔학한 진압방법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또 3.1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의 조종이 있었다는 일제 군경의 중상을 정면 반박했다. 그는 일본 교토의 기독교 대학 도시샤대학교 출신인데 그것이 대담한 정론에 대한 의협심의 근거가 된 것이 확실하다.
‘재팬 어드버타이저’나 ‘재팬 크로니클’ 그리고 ‘아사히신문’도 총독 정치를 계속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해 4월 7일자 ‘아사히신문’에는 ‘조선의 통치, 진정 후의 방침’이란 글이 실렸는데 여기 일본의 양식이 그래도 한 가닥 빛나고 있었다. 우선 이 3.1운동이 무지우매한 집단의 행동이 아니고 종교 지식계급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점, 병합 10년에 무사태평을 구가한 총독정치의 위신이 하루아침에 상처 입은 것, 이번 거사는 급변하는 세계 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 일본식 강요나 취체(단속)는 천박하다는 것 등 이었다.
다른 하나 눈에 뜨이는 인물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과장급 인사 나카라이 기요시이다. 그는 일종의 보고서 형식의 글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한국교회에 대해 여러 오해들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 내용은 기독교는 모름지기 유해무익한 것이고 선교사들이 다 뒤에서 선동하고 음험한 일들 꾸미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인물들을 가리켜 ‘자’들이란 말을 썼는데 ‘자식들’이란 욕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 중 또 하나는 총독부 내무국장이던 우사미 가츠오이다.
저 건너편 적대층 안에는 우리와 손잡는 의의 세력이 있다. 여기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다. 의의 동력은 어디에나 있다. 이 세력이 세계를 의의 세계로 함께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