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1월 20일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민족의 계시록 한국 교회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의 원동력이었던 한국교회
시련의 때를 넘어 희망의 횃불들고 도약하는 영적 거인돼
3.1독립운동 한국교회 피해상황
3.1독립운동에서 가장 가혹한 보복이나 공격이 기독교 교세가 우세한 지방에 집중되고 있었다. 가장 참혹하였던 비인도적 참화는 수원 부근의 제암리감리교회 사건이다. 그 사건의 주모자는 헌병 중위 아리타 도시오이다. 그는 교인 30여 명을 교회당 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다 타죽게 했다. 이 사건은 그 참혹성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3.1독립운동 일제 탄압 참화의 상징이 됐다.
3.1독립운동 당시의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의 피해 상황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총독부의 공식적인 통계 발표라고 하는 점을 알고 보는 것이 좋다.
독립운동 참여 인원 205만 1448명 피살 7500명 부상 1만5850명 감옥에 갇힌 자 4만6306명 파손 소실 교회 47개소 민가 715호였다. 입감자수는 기독교인 1967명 천도교인 1322명 불교 102명 유교 55명 무종교 4980명이었다. 기독교 입감자의 비율은 24%인데 인구 비례 1.5%에 불과한 기독교인의 입감자수는 전체 입감자의 비율로 보아 막대하다.
국외에서의 교회 피해
일제 잔학행위는 1920년 말까지 국외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간도의 노루바위사건이란 것이 그것이다. 33촌락이 불에 타고 그와 함께 한국인 주민들도 전부가 살해되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는 서북 간도에서 학살 3469명 체포 170명 강간 71명 민가 소실 3209동 학교 소실 36동 교회당 파괴 14개 처에 이르고 있었다.
함북노회는 그 펜이 젖어 있었다. “3.1사건으로 인하여 간도교회는 풍운이 걷힐 날이 없었으니…”
희망의 선포
이런 시련과 참상인데도 교회는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었다. 당시 총독부 문서나 미국 교회협의회(NCC)는 ‘한국교회만이 참혹한 식민통치하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아니한 유일한 부류의 한국인들’이란 보고를 한다. 기독교 정신으로만이 이해될 수 있는 독립선언서에 그 기상이 높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는구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남궁억은 이 불 타고 만신창이가 된 한국 국토가 비단으로 수를 놓은 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라고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그해 공교롭게도 남궁억은 ‘기러기’란 노래를 부른다. 기러기가 짝을 잃고 날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노래인데 나라를 잃고 3.1독립운동에서 폭압에 시달려 외로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렇게 보고 지은 노래이다. 그런데 그 3절은 찬연한 계시록이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는 양춘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이처럼 민족의 자립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고 내일에 대해 사라지지 아니하는 정열을 안겨다 주었던 것이 교회였다. 이때 교회는 민족의 얼과 그 희망의 봉화대였다.
‘울밑에 선 봉선화’로 알려진 새문안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은 1920년 3.1독립운동 직후 이 노래를 짓는다. 그리고 다들 온 민족이 눈물로 부른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을바람 일자 북풍한설 찬바람에 형체까지 없어질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영혼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당시 이 봉선화와 기러기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3.1독립운동 와중에서 황해노회는 이런 보고서를 낸다. 곧 “지나간 3월 이래로 비상한 고난과 풍파를 당하여 손해 피해는 없지 못하오나 영적 실력은 더욱 전진되어 연단한 믿음과 인내하는 소망으로 천국이 속히 임함을 기다리오며.”
교회와 교육의 진흥
한국교회는 3.1독립운동의 그 시련 이후 놀라운 진흥발전을 한다. 그것은 ‘전례 없는 기회’였다. 그 진흥은 신앙과 도덕 산업 사회생활 정치 실업 및 정신적 생활에서의 기독교 영향의 확대로 나타났다. 3.1독립운동 격돌 이후의 아픔을 딛고 전국에 도약 도전의 기운이 치솟고 있었다. 가령 서북의 남산 모루교회는 150명이 모이던 교회였으나 3.1운동 때 교회당은 불에 타고 목사는 순교하고 장로들은 망명하였는데도 400여 교인이 모여들고 있었다. 기독교 학교의 진흥은 ‘전대미문’이었다. 기독교 학교 학생 수는 3.1운동 이전에 비해 통계상 87% 증대하고 있었다.
이런 급격한 진흥은 한국교회가 이제 역사의 무대 위에서 횃불을 들고 희망으로 도약하는 거인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희망의 신앙, 그 역사적 의미
1919년 말 미국 북장로교회는 한국교회가 3.1독립운동 때 겪은 시련과 그 불굴의 신앙, 희망의 선언에 감동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근대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을 이룬다고 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도 신앙의 대응이 그런 시련 속에서 전국적으로 그렇게 눈부시게 나타난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격찬한다. 1920년 11월 ‘코리아 밋션 필드’는 한국은 3.1독립운동에서 하나님의 무궁한 것을 정신적으로 다 소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제 그것을 동양과 세계가 풍요하게 될 수 있도록 베풀고 펼치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고 밝힌다.
한국교회는 3.1독립운동 당시 이처럼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민족 그 미래를 약속하는 계시록으로 드높이 빛나고 있었다.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