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심 통해 잘못 고백하고 진실 규명에 앞장서다
캄보디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른 체구에 좁은 어깨의 노인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크메르루즈 정권의 대학살을 다루는 프놈펜 특별국제재판정에 선 그의 이름은 두크(본명 캉 켁 이우)였습니다. 두크는 캄보디아 공산당(크메르루즈) 시절 비밀경찰이 운영한 교도소 S-21의 책임자였습니다. S-21은 비밀경찰이 잡아온 사람들을 분류해 처형하거나 집단농장으로 보내는 곳이었습니다. S-21 교도소장 두크의 이름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공포의 대명사였습니다.
크메르루즈는 1975년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새로운 캄보디아를 건설하겠다”며 4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50만명이 넘는 국민을 숨지게 했습니다. 1979년 1월 베트남 군대가 프놈펜에 진격해오자 최고 집권자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즈의 간부들은 모두 밀림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두크도 피신했습니다. 그는 프쾀이란 시골 마을에서 항핀이라는 가명으로 살았습니다. 1992년 이웃에 살던 수온시토라는 농부를 따라 그 곳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두크는 건물을 얻어 교회를 개척하고 이웃의 젊은이들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 가족과 함께 기도를 했고 일요일마다 온 가족 앞에서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일에 죄책감을 느낀 두크는 월드비전이라는 기독교 구호단체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 그 곳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가 일주일 만에 다시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혹시 당신이 두크 아닙니까?” 두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S-21의 소장 두크가 살아있다는 뉴스에 캄보디아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경찰은 그를 즉시 체포했습니다. 두크가 수감된 채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크메르루주의 최고지도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 밀리의 오두막에서 숨졌습니다. 군사령관도 외교장관도 사망했고 내무장관은 치매에 걸려 석방됐습니다. 크메르루즈 문제는 복잡한 국제문제였습니다. 진실을 파고들면 중국과 미국 베트남은 물론이고 캄보디아 현 정부도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 있었기에 모두가 재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킬링필드의 최고 책임자들이 하나 둘 병들고 죽기를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두크는 크메르루즈의 진상을 밝히는데 적극 협력했습니다. 수사기관과 함께 증거를 찾아내고 기꺼이 진실을 증언했습니다. 두크가 없었다면 아예 재판이 열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2009년 3월 30일 킬링필드 학살을 재판할 특별국제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첫 피고인은 일개 교도소장이었던 두크였습니다. 방청객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10년 동안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다 이미 67세의 노인이 된 두크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면서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처형장으로 보내질 때면 괴로워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당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의 지시로 한 일이지만 지난 정권의 생존자들과 S-21에서 잔혹하게 숨진 이들에게 저의 잘못을 고하고 싶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입니다. 크메르루즈의 모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크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지금도 프놈펜의 교도소에서 복역중입니다.
특별재판을 지켜본 존 시오사리 스탠포드대 교수는 “모든 크메르루즈 간부들이 사회주의 성취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고 핑계를 댈 때 두크 혼자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김지방(국민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