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부터 2000년 초여름까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드라마 ‘허준’에 푹 빠져 있었다. 평균 시청률이 48.9%를 기록했을 정도니 TV를 켠 사람들 중 절반이 ‘허준’을 본 셈이다. 나도 삼십 대에 소설과 드라마로 몸에 익히다시피 ‘허준’을 읽고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허준’은 내게 ‘인생드라마’가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나 강의를 할 때면 자주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끼워 넣고는 했다. 게다가 유별나게도 이 드라마엔 명대사들이 넘쳐났다.

 그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왜란이 터지자 사람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허준의 가족들도 피난행렬에 끼었다. 허준은 궁의 의서들을 챙기고 임금을 쫓아가느라 가족 돌볼 여유가 없었다.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한 허준이었으나 그의 몸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허준의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가족보다 공무에 바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피난길에서 결국 폭발했다. 그때 허준의 아내 ‘다희’가 아들을 보고 말했다. 긴 대사였다.

 다희도 한때 지아비인 허준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허준이 갓 결혼하여 의술을 배우겠다고 의원을 찾았는데 오해를 받아 스승으로부터 쫓겨났을 때였다. 오랫동안 술로 허송세월하며 폐인처럼 살았다. 다희는 아들을 업고 저잣거리에 나가 칡뿌리를 팔면서 힘겹게 연명했다. 그런 중에 허준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다희는 정말이지 막막했다. 남편에 대한 믿음도 깨지고 원망만 산처럼 쌓였다. 그러다가 인근 철광에서 허준을 보았다는 소리를 듣고 다희는 모질게도 추운 겨울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산길을 걸으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남편을 만나면 가슴에 쌓아둔 원망을 다 쏟아놓겠다고, 식솔들한테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는지 따지겠다고….

 아들은 어머니의 말에 공감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 아들을 향해 다희는 이제 반전을 준비한다. 아버지의 진심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였다. 다희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헌데 아버지를 본 순간 아무 말도 못했어. 왜 그런 줄 아느냐? 내가 마연동 철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진 광산 납판사고로 다친 병자들을 돌보고 계셨다. 성심을 다해 병자들을 돌보는 아버지를 본 순간, 그때까지 아버지를 향해 쌓인 원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은 내가 아버지를 만난 이후로 가장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내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진 아버지가 서신 자리에서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이번 피난길도 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다희는 아들에게 이제 그만 가슴에 묻어둔 원망을 털어버리라고 달랜다. 지금도 이 장면을 다시 돌려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내로부터 이런 존경을 받는 남편의 삶이 부러워서만도 아니다. 남편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아내를 둔 부러움만도 아니다. 모르긴 해도 그런 ‘반듯함’을 세우기까지 아내와 남편이 살아온 세월이 더욱 부러웠던 것 같다.

 드라마 ‘허준’을 이야기한 까닭은 이 드라마의 작가 최완규 씨 때문이다. ‘주몽’ ‘상도’ ‘올인’ 등 한국 드라마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그가 도박에 빠져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는 빚에 쪼들려 날마다 자살의 유혹 속에 살아가고 있단다. 곁에서 이 아까운 ‘천재작가’를 지켜보던 어떤 이는 날마다 그를 생각하며 기도해 왔단다. 그가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그래서 다시 삶의 소망을 갖게 되기를, 또 그가 가진 재능을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러면서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그래서 나도 기도를 시작했다. 드라마를 통해 삶의 ‘반듯함’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준 그를 위해서. “하나님, 그가 하나님을 만나 비로소 인생의 ‘반듯함’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다시 쓰는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박명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