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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마지막회) - 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교단의 부흥과 성장을 이끈 조용기 목사 나와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6.25 전쟁의 시련은 한국의 오순절 운동에 가해진 일대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불굴의 생명력으로 한국 오순절 운동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최초의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탄생이었다. 이제 한국 오순절 운동은 교단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교회 성장을 가져온 조용기 목사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의 마지막 회로, 이후의 한국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본지에 연재된 교회 창립 60년의 관련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1.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탄생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군목으로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인 엘로드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하러 다니다가 허 홍 목사를 만나 교제하게 되었다.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간 엘로드는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하였다. 이 무렵 박성산 목사도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이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성회 측에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 후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넛을 1952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체스넛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는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였다. 마침내 1953년 4월 8일 허 홍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남부교회에서 체스넛, 박성산, 허 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과 그 외 4인의 참관자를 포함해 총 1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교단이 창립되었다.  

 창립총회에서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결정되었고 초대 총회장에는 체스넛 목사가, 서기 겸 재무에는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또한 교역자 양성을 위해 순복음신학교를 속히 세울 것을 결의하였고 신설될 학교 교장에 체스넛 목사를, 학감에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순복음신학교는 1953년 5월 허 홍 목사가 담임하던 남부교회에서 문을 열었다. 


 2. ‘성장통’을 겪은 교단

 교단이 발족하자 모든 교역자와 성도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3년 10월 7일 교단 창립 후 처음으로 개최된 광주 총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교세는 9개 교회에 약 500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외 9개의 교회가 교단 가입을 신청중이었다.  

 한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을 주도하였던 체스넛 선교사가 1955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여러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총회장이었던 체스넛 선교사는 한국을 떠나면서, 리더십 부재 현상이 나타났고 다음해 순복음신학교에서 동맹 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1956년 4월 26일 총회를 열고 제2대 총회장으로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곧 개교회 재산의 교단 귀속 문제를 놓고 교단 내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개교회의 재산은 개교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허 홍 목사 측과 개교회의 재산은 교단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선교사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국 교단 분열로 이어졌다.

 1957년 11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종교재단법인으로 등록하였고 이를 반대하던 허홍 목사와 그 지지자들이 교단을 이탈해 대한오순절교회를 설립함에 따라, 교단은 창립 4년 만에 분열되고 말았다. 


 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안정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을 겪은 교단 지도부는 교단의 안정과 확장을 위한 일련의 부흥 집회를 개최하였다. 1957년 가을 미국 하나님의성회 부흥사인 허만 목사가 내한하여 중앙청 앞 광장에서 24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는 하나님의성회에서 개최한 최초의 대규모 집회였다. 1958년 여름에는 버드 목사가 내한하여 수원, 대전, 부산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하였다. 한편, 미국 ‘치유의 소리’(Voice of Healing) 선교회 소속의 신유사역자인 샘 토드 목사가 내한하여 1961년 9월 1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서대문 네거리에 천막을 치고 성회를 개최하였다.

 미국 하나님의성회도 분열의 상처를 겪은 한국 교회에 영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전 지구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세계의 주요 도시에 선교 거점을 세워 이를 통해 집중적으로 도시선교를 전개한다는 ‘지구정복’(Global Conquest) 프로그램을 가동하였다. 특별히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1959년 말 한국을 지구정복 프로그램의 시범사업 국가로 지정하고 약 2만 달러의 거액을 투입하여 교회사업, 문서사업, 선교사업, 신학교 확장 등에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대조동에 신학교 이전용 대지 약 1만 평을 구입해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서대문에 292평의 대지를 구입해 1962년 2월 18일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순복음부흥회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1964년 6월 ‘월간 순복음’이란 오순절 잡지를 발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차 교단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 젊고 능력 있는 사역자인 조용기 목사가 등장하였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리차드 선교사를 통해 오순절 신앙을 받아들인 조용기 목사는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1958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학교 동기인 최자실 목사와 함께 서울시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와중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되었고 교단은 잠시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후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1957년에 교단에서 이탈한 허 홍 목사 측도 15년이 지난 1972년에 다시 교단으로 들어와 재통합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단의 안정 가운데 한국 오순절 운동을 힘차게 이끌어갈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바로 조용기 목사가 있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사입력 : 2018.06.03. am 10:27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