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일제 탄압과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뿌리내린 오순절 신앙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도입된 오순절 신앙은 허 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에 의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국권 회복과 애국 계몽 운동을 못마땅히 여긴 일제는 기독교를 무참히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 오순절 교회도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번주에는 한국 오순절 교회에 임한 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진 것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연관 있었다. 만주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을 완전히 장악해야 할 필요가 커졌고, 신사참배는 이를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일왕과 일본 왕실의 조상들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럼시 선교사가 허 홍과 함께 서빙고교회를 세운 1932년은 이러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가 극심해질 무렵이었다. 럼시 선교사의 제안으로 함께 사역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한 박성산이 한국에 도착한 것도 같은 해였다.
일제의 오순절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럼시 선교사는 1939년 2월 10일 강제 출국을 당했다. 배부근 목사와 함께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에서 사역했던 메르디스 선교사와 베시 선교사 역시 1940년 12월 20일에 강제 출국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순절 교회의 전도를 책임지고 있던 허 홍 목사는 중병에 걸렸고, 수창동교회와 서빙고교회는 경제적 어려움마저 겹쳐 문을 닫게 되었다.
아직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오순절 교회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피어오르던 한국 오순절 신앙의 불꽃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 아래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다.
2. 한국 오순절 교회의 회복
1) 광복 이후 한국 오순절 교회
위기에 휩싸인 한국 오순절 교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계기는 바로 조국의 해방이었다. 해방이 되자 오순절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오순절 교회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먼저 곽봉조가 있었다. 그는 일본 이코마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미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하던 오순절 신앙인이었다. 신학교 졸업 후 오사카에서 ‘조선예수교오순절’이라는 한인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 전도에 힘쓰던 그는 광복을 맞게 되자 망설임 없이 귀국했다.
그리고 윤성덕 역시 일본에 거주하던 중 이코마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을 맞이해 귀국한 후 1948년 전남 광산군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오순절 신앙을 뜨겁게 증거하였다.
광복 이후 이러한 오순절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복덕은 전남 해남의 한 장로교회에서
오순절 신앙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녀에게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자, 다니던 교회에서 출교당하였으며 그녀는 작은 예배처를 세워 독립하였다. 이곳 예배처를 방문하여 큰 은혜를 받은 표 씨 부인이란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간 후 예배처를 만들어 오순절 신앙을 증거하는 데 매진했다. 당시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박귀임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1947년 6월 표 씨 부인을 만나 오순절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령침례를 받은 박귀임은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순천중앙장로교회로부터 출교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함께 출교당한 오순절 성도들과 함께 순천 남내동에 있는 가옥을 빌려 ‘대한기독교 순천오순절교회’를 개척했다.
교회가 부흥하자 박귀임은 박헌근 장로를 전임 전도사로 초빙했고, 이후 교회는 300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박귀임은 광주에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 교회는 훗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광주순복음교회가 되었다. 박귀임의 제안으로 박헌근 전도사가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하게 된 지 1년 6개월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에 열심을 다해 성도를 돌보던 박헌근 전도사는 공산군에게 검거되어 한국 오순절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2)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 개최
해방 이후 서울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오순절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성환 목사는 목포시 산정동에 있던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아 1948년 여름에 창립 예배를 드렸다. 같은 시기에 전남 광산군에서는 윤성덕 목사가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 예배를 드렸다.
서울 광화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박성산 목사는 해방이 되자 배부근, 허 홍 목사와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오순절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동역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는 박귀임 전도사가 순천과 광주에서, 김성환 목사는 목포와 무안군 일대에서, 그리고 윤성덕 목사는 광산에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의 오순절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1950년 4월 9일, 전라남도 순천에서 박헌근 전도사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개최되었다. 박성산, 윤성덕, 허 홍, 김성환 목사, 박헌근, 박귀임 전도사 등의 목회자를 비롯하여 약 200여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 이 대회는 한국의 오순절 교회가 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에는 잠시 대회가 중단되었으나, 이후 제2회(1952. 5. 4), 제3회(1952. 10. 5) 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 오순절 교회는 크나큰 피해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 전인 1952년 말까지 총 8개의 교회들이 재건되거나 새롭게 창립되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전쟁의 처참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오순절 신앙 공동체의 발흥은 꺾여질 수 없었다.
이렇듯 오순절 신앙의 씨앗은 한국 땅에 뿌려진 후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탄압에 철저히 짓밟혔으며 광복을 맞이하여 잠시 회복된 듯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혹독한 시련 가운데도 오순절 신앙은 결코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비바람을 이겨낸 한국 오순절 교회는 이제 위대한 부흥의 거목으로 성장할 토양을 지니게 되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