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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60주년을 향하여-5 영광스런 성령의 인도


개척 14년 만에 1만 명 들어가는 성전 완공대성전 뿐 아니라 부속 건물 속속 들어서오산리 군부대 인근서 철야 기도 ‘기도원’ 시작국내외적 성령 역사 체험 ‘기도의 성산’으로 유명
            


 여의도 시대 열리다

 1973년 8월 15일 마침내 1만 명이 함께 앉아 예배드릴 수 있는 여의도성전이 완공됐다. 모래벌판 위에 웅장하게 세워진 성전을 바라보던 조용기 목사는 벅찬 감격에 젖었다. 성전 건축으로 인해 3년 4개월 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조용기 목사는 이제 끝이야’라던 사람들의 수많은 비난, 뼈대만 올라간 앙상한 성전 지하실에서 떨어지는 녹물을 맞으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부르짖던 기도가 생각났다.
 험난했던 과정을 거쳐 세워진 여의도성전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헌신의 결과였다. 전쟁 후 가난한 동네 대조동에서 찢어진 천막으로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린 지 14년 만이었다.

 4000여 평 대지 위에 세워진 교회는 연건평 3200평 규모였다. 들어간 자재만도 시멘트 6만6000포대, 벽돌 165만 장, 철근 400톤, 철골 250톤으로 공사비 8억4100만원이 소요됐다. 조용기 목사와 성도들은 8월 19일 여의도성전에서 감격적인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당시 성도는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옮겨온 8000여 명이었다.
 여의도성전 헌당예배는 9월 23일에 열렸다. 헌당예배를 늦춘 데에는 중요한 행사가 새성전에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전세계 오순절 신앙인의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오순절대회(Pentecostal World Conference·이하 PWC)였다. 1947년 스위스 첫 모임을 시작으로 3년마다 열리는 PWC 제10차 행사가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간 우리 나라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된 것은 제9회 PWC 미국대회(1970년)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조용기 목사의 노력의 결과였다. 제10회 PWC 서울대회에는 39개국 2000여 명의 외국인 목회자와 성도가 참석해 김포공항 개항 이래 최대 외국인이 입국한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또 국내에서만 5만여 명이 참석해 화제가 됐다. 여의도 새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국제 행사를 위해 성도들은 헌신적인 봉사에 앞장섰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날이 돼서야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헌당예배는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 그리고 교역자, 전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은혜와 감격 속에 열렸다. 헌당예배에서 건축위원장으로부터 성전 열쇠를 건네받은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만 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는 여의도로의 이전을 계기로 부흥의 박차를 가했다. 성전 건축을 통한 고난이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심어준 중요한 기회가 됐던 것이다. 모래벌판에 세워진 여의도성전은 교통편이 아주 불편해 교회까지 오려면 마포 종점에서 내려 살을 아리는 강바람을 견디며 한강 다리를 건너와야 했다. 그래도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해 교회를 출석했고,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기 시작했다.
 교회는 77년 1월 지상 10층의 세계선교센터(현 제1교육관)를 완공했고, 7월에는 교회창립 20주년(1978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관(현 십자가탑 위치)을 세웠다. 또 81년에는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의 세계선교센터(현 제2교육관)을 세워 세계선교의 선봉장으로서의 확실한 자리매김에 나섰다. 


 기도의 성산 ‘오산리 기도원’ 설립

 교회가 대조동에서 서대문으로 이전한 지 7년이 지나자 성도 수는 6000명이 넘어섰다. 매년 많은 성도들이 소천하자 교회는 성도들을 위해 공원묘지 설립을 결의했다. 그리고 당시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오산리에 470만원의 기금으로 3만여 평의 대지를 확보했다. 5년 후 1972년 여의도성전 건축 문제로 최자실 목사가 교회 묘지가 있던 오산리에서 철야기도 한 것이 세계적인 기도원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당시 묘지 주변은 농장과 군부대 뿐이었다. 최자실 목사와 기도의 동역자들은 밤새 기도 소리가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굴을 파 그 속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이후 굴에 문을 단 것이 지금의 ‘기도굴’이 된 것이다. 최자실 목사는 묘지 주변의 땅을 구입해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는 기도원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여의도성전이 완공되기 6개월 전부터 기도원 목회를 시작했다. 시설은 미비했지만 교인들이 이 곳에서 기도하며 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을 체험하자 1973년 3월 7일 오산리에는 초교파적인 기도원이 세워지게 됐다.

 성도들의 입소문에 기도원을 찾는 이가 많아졌고 규모는 점차적으로 커져 78년에는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과 숙소가 확충됐다. 그래도 기도원은 찾아오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급기야 1982년 9월 4일 1만명 수용이 가능한 대성전을 세웠다. 또 5000명이 성전과 숙소로 사용 가능한 2개 부속성전이 완공됐다.
 기도원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려져 해마다 찾는 이들이 늘었다. 국내외 목회자들이 오산리 기도원에서 사역에 대한 응답을 받았고, 현재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따라 다양한 사역에 나서고 있다.
 기도원이 국제적인 면모로 변해가면서 1985년 기도원 명칭이 ‘국제금식기도원’으로 개칭됐고, 최자실 목사 소천 후에는 최 목사의 공을 기리는 의미로 1991년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그 이름이 변경됐다.
 고난과 역경은 컸지만 여의도 새성전 건축과 오산리 기도원의 설립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었고, 영광스런 성령님의 인도였다.

 

기사입력 : 2017.11.05. am 11:00 (입력)
오정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