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흥 경험했으나 시대적 아픔 속에 사라진 교회

장대현교회서 분립, 수많은 교회와 학교 등 세워
신사참배 결의, 공산 세력 옹호 등 격랑의 세월 보내
평양에 위치한 서문밖교회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세워진 장대현교회에서 1909년 분립된 교회다. 처음 서문밖신학교를 임대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이 교회는 당시 남녀 세례교인이 408명이었고, 어린이가 109명이다. 서문밖교회는 그해 6월 이미 장대현교회에서 장로였던 위창석 주공삼 김선두와 새로 장립된 박영일 등 장로 4명을 피선하고 교회부흥을 위해 힘써나갔다. 마포삼열 목사(미국명 : 새뮤얼 모펫·평양 장로회 신학교 설립자)는 장로에서 목사가 된 주공삼과 이후 김선두 목사와 함께 협동 사역을 진행하면서 무엇보다 교회학교 부흥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14년 주일학교 학생 수는 1200명으로 늘었고, 교사 수 만도 고등부 교사 72명, 유년부 교사 42명이었다. 서문밖교회는 1915년 김선두 목사가 전임 목사로 되면서 부흥을 향한 행보를 이어갔다. 급기야 불어나는 성도들을 주체할 수 없어 1922년에는 150평 규모의 2층으로된 새성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2층은 예배당으로, 1층은 교회학교 교수실로 사용했다.
1922년 12월에는 장로 정일선이 목사안수를 받고 김선두 목사와 서문밖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그해 이영훈 목사의 조부인 이원근 장로도 장립을 받았다. 서문밖교회는 부흥을 거듭하면서 1929년 성도 수가 3000명 안팎으로 늘어났으며 평양에서 모범되는 교회가 됐다. 북봉수리교회, 현암교회, 주촌교회, 대타령교회 등을 분립시켰고 숭덕학교 숭현학교를 설립하고 유치원과 야학도 운영했다.
하지만 격랑의 역사 속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 3월 1일, 김선두 목사와 정일선 윤기화 장로 그리고 남녀교인 1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사건’으로 인해 투옥당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에 나섰다. 이원근 장로도 그 당시 만세 사건에 연루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일본의 강력한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1938년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차 장로교 총회에서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만다. 당시 사복경찰이 교회 안팎으로 포위하고 경찰간부 수십 명이 칼을 차고 교회당을 포진하고 있었다. 시대적 아픔이 배어나오는 순간이었다.
당시 서문밖교회는 중요한 교회 중 하나였기에 중요한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복음을 받아들인 지 50년이 되는 해인 1934년 ‘희년 총회’로 불리우는 제23차 총회가 열리는가하면 해방직후인 1946년 평양노회 면려청년대회가 최초로 열렸다.
하지만 서문밖교회는 1950년 공산정권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또 다시 아픔을 겪어야했다.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장로교 교역자들이 서문밖교회에 모여 공산정권에 협력하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권한 것이다. 또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의 교인들이 서문밖교회에 모여 북한이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궐기대회를 열었다. 반면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는 한경직 목사가 평양에 들어가 서문밖교회 주일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당시 평양 서문밖교회가 있던 곳은 평양 하수구리로, 지금의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이다. 평양의 중심부인 이곳은 교회가 사라지면서 현재 평양만수대 예술극장이 들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