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도움 없이 세워진 조선의 최초 개신교회

서상륜의 회심으로 교회 설립, 주민 90%가 기독교인
북한에 공산정권 들어서면서 교회 문 닫게 돼
한국기독교 10주년 기념해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복원
소래교회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회다. 최초 뿐 아니라 외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우리 민족,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라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곳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로, 교회를 설립한 서상륜의 고향이다. ‘소래’의 본래 이름은 ‘솔샘’으로 소나무와 샘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솔샘의 한문표기인 송천(松泉)이 일본인들에게 의해 ‘솔내’로 변하고 음운현상에 따라 ‘소래’가 된 것이다.
서상륜이 교회를 세운 시기는 대략 1884년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장사를 했던 서상륜은 30세였던 1878년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이 서상륜을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킨 것이 존 로스 선교사와 만남으로 이어진다. 로스 선교사의 정성어린 간호와 복음전파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는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고 진실한 신자가 된다. 로스 선교사를 도와 중국에서 조선어 성경 번역에 힘쓴 서상륜은 1883년 번역된 성경을 들고 조선으로 들어오다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그 일로 피신해 고향인 황해도 소래에 정착,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선다.
소래교회의 첫 시작은 아주 초라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나라인 만큼 관청의 눈을 피해 예배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더우드와 알렌의 영향으로 고종이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하면서 소래교회의 상황도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래교회가 탄생된 지 10여 년이 지난 1896년 경 소래교회는 마을 주민 58세대 중 50세대, 80여 명이 기독교인이 됐다. 마을 주민 90%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교회증축은 이 마을의 공동목적이 됐다. 건축위원회가 조직됐고, 선산의 소나무를 건축자재로 드리는 성도들이 생겨났다. 물론 이때도 서상륜의 역할이 컸다.
또한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의 헌신도 대단했다. 이후 서경조는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으로 서상륜이 복음 전파를 위해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소래교회를 이끌게 된다. 소래교회가 증축될 당시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한국 성도들의 헌신 속에 지어졌다. 재정적 어려움을 알고 선교사가 돕기를 희망했을 때 서상륜은 후세에 떳떳하고 싶다며 순수한 우리 힘으로 교회를 짓겠다는 의사를 전한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1895년 7월 8칸 기와집으로 세워지고, 이듬해 다시 16칸 32평으로 증축된다. 그리고 서북지방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가 된다. 하지만 소래교회는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성도 대다수가 남한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교회문이 닫히고 만다.
한국 초대교회 믿음의 선조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소래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아 1988년 총신대 양지캠퍼스에는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북한교회의 재건, 남북 통일을 위한 기도처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소래교회를 복원, 보존하고 있다.(사진 오른쪽) 복원된 교회는 1895년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 번째 예배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교회 앞에는 소래교회 설립 약사를 통해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이 강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