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에 남북통일에 힘쓴 음악가로 기억되고 싶다

험난한 벌목장에서 만난 에벤에셀의 하나님
남북 닫힌 마음의 문 열어주는 것이 바로 ‘음악’
매년 평화음악회 개최, 통일 위한 민간외교 나서
6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됐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제1회 평화나눔페스티벌. 통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 참석자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했다. 이날 출연진 중에는 누구보다 남과 북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날을 기대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서울이기는교회)다.
2001년 10월, 북한을 탈출해 두만강을 건넌 김철웅 교수는 모진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2002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 인사다. 탈북의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였다.
김철웅 교수는 북한 상위 1%에 속하는 부유층 출신이다. 67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뒤 러시아 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서 공부한 수재다. 유학시절 경험한 자유로운 음악 세계에 매료돼 음악의 자유를 위해 탈출한 그가 처음 맞이한 것은 혹독한 현실, 그것도 흑룡강성 벌목장에서의 막노동이었다. 자신이 갈망했던 자유로운 음악과 거리가 먼 삶이었다.
고난의 연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피아노를 전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환경이었는데, 누군가 교회를 가면 그토록 원하는 피아노를 볼 수 있다고 알려줬다. 서둘러 흑룡강성의 한 교회를 찾은 그는 눈앞에 놓인 십자가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에벤에셀(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2002년 남한에 도착한 뒤 김철웅 교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연주회, 간증집회로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의 공연도 잦았다. 2005년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협연, 노르웨이 베르겐 북한인권 관련 국제회의 특별 연주, 2008년 미 국무부 초청연주 그리고 전세계 음악가의 꿈의 무대이자 자신도 그토록 소원하던 미국 카네기홀 공연도 2009년 실현됐다. 미국 50개주 가운데 30여 개주에서 공연을 가졌다. 신앙심 깊은 집안에서 자란 배우자를 만나 믿음의 가정도 꾸리게 됐다.
“처음 남한에 왔을 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의욕만 앞설 뿐이었죠. 그런데 되돌아보니 제가 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성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또 늘 따라다니는 ‘탈북 피아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부담됐지만 저를 통해 ‘희망을 보게 됐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피아니스트가 되고 하시고 북한에서 탈출하게 하셨는지 그 뜻을 헤아리게 됐습니다”
김철웅 교수는 현재 서울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매년 예술의 전당에서 평화콘서트, 국제무대에서 남북한이 한데 어우러진 한민족 음악의 우수성을 전하며 남북 통일의 중요성을 알리는 민간외교에 힘 쏟고 있다.
얼마 전 김철웅 교수는 연변대학을 다녀왔다. 연변대 예술학원 인재들과의 만남으로 그는 전에 없던 평화음악회를 계획 중이라고 했다.
“연변은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음악적 교류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고요. 남북의 연합에 있어 연변이 충분히 가교역할에 나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연변대에서 평화음악회와 문화예술세미나를 개최해 볼 계획입니다. 저는 문화적 교류, 특히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음악적 교류가 통일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철웅 교수는 누구보다 음악의 힘을 알고 있다. 그래서 탈북 청소년과 남한 청소년으로 구성된 ‘아리랑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곳곳에 ‘평화의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 한 두 번 외침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볼 때면 머지 않은 때에 통일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통일의 그날, 그는 무엇보다 복음이 먼저 북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길 기도한다고 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사랑과 행복을 주는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김철웅 교수. 그는 탈북 피아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먼 훗날 후대에 ‘남북통일에 힘쓴 음악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글·오정선 / 사진·김용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