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을 듣기도 하고, 능력 있는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목격하면서 많은 교훈과 훈련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을 때(마 10:1), 그들도 주님처럼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막 6:12∼13). 그들이 자주 부족한 언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을 때(막 14:27),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다(막 14:31). 여기에서 우리는 (나중에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처음 의도만큼은 주님의 운명과 같이 하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12제자들의 ‘충성도’는 여기까지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들이닥치자(막 14:43) 그들의 비장했던 ‘희망사항’과는 달리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거나(가룟 유다), 부인하거나(베드로),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나머지 열 제자). 예수님의 ‘공식 제자단’이라고 할 수 있는 12제자 그룹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바로 이때 그동안 이들 12제자들에게 ‘가려져 있었던’ 이름 없는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맹인 바디매오는 그의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의 눈까지 밝아져 12제자들은 가기를 거부했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를 ‘따라감’으로써(막 10:52) 이름 없는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남성 제자들 틈에 숨겨져 있던 여성 제자들이 대거 ‘외롭게’ 고난당하시는 주님 곁을 지킨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십자가 처형, 매장, 부활의 목격자가 된다(막 15:40∼41, 47, 16:1∼8).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이 ‘비공식’ 제자들에 의해 대체되는 순간이다. 공식/비공식, 내부자/외부자의 경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눅 13:30) 대역전이 일어났다. 이번 호에서는 계속해서 이름 없는 제자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공관복음의 여성 제자들
공관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에 특히 12제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더 나아가 몇몇 여성들은 ‘제자’의 수준에까지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공관복음 전체에서 침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로디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남성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섬긴 여성 제자로 베드로의 장모를 들 수 있다(마 8:14∼15, 막 1:29∼31, 눅 4:38∼39).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그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었다”(마 8:18). 여기에서 “수종들다”는 표현은 제자도의 전문용어인 ‘섬기다’(디아코네오)와 같은 단어이다.
또한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도 이름 없는 제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막 12:41∼44, 눅 21:1∼4).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21:4). “생활비 전부(판타)”를 하나님께 드린 것은 누가복음이 요구하는 제자도(弟子道) 중 중요한 한 항목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판타)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 또한 이름 없는 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막 26:6∼13, 막 14:3∼9).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심으로써 이 여인의 헌신을 높게 평가하셨다(막 14:8, 9). 이 여인의 행동은 나중에 또 다른 ‘여성 제자들’이 ‘(돌아가신)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무덤에 갔지만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막 16:1∼8)을 고려할 때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도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여성 제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눅 10:38∼42).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예수님을 섬기는(디아코네오) 일로 분주했지만,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다(눅 10:39). 주석가들은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사도 바울이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행 22:3) 것을 서술한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야말로 당시의 여성의 역할을 부엌일로만 제한한 사회적 관행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제자로까지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심으로써(눅 10:42) 전통적인 여성상 보다 예수님께 배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제자로서의 열정을 더욱 높이 평가하셨다.
2. 요한복음의 여성 제자들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이름 없는 여성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사마리아 여인이다. 그가 처음 예수님과 마주쳤을 때는 매우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당신은 유대인 남자’, 요 4:9).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단계에 걸쳐 예수님에 대한 인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야곱보다 위대한 분’(요 4:12)에서 ‘선지자’(요 4:19)로, 그리고 급기야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요 4:25)로까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했다(요 4:39). 이렇게 해서 이 이름 없는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돼 복음을 전파한 제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의 두 누이동생도 여성 제자들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고(요 11:1∼3),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으며(요 11:27), 마리아 또한 베다니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 발아래 엎드려” 맞이했다(요 11:32).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믿도록 하는데 일조하였다(요 11:45).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이름 없는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맹인 바디매오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 제자들 중 성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이야기를 요약해서 서술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말미에 12명의 ‘공식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직후에 등장하여 그들의 빈자리를 열정과 성실로써 채워나갔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매장, 그리고 부활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끊이지 않고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이름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뒤돌아서지 않고 제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