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연약한 나를 높여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소아마비 장애딛고 ‘기적’으로 미국 음대교수 돼
재능기부로 바이올린 배워, 자신도 재능 기부 나서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교수가 된 자랑스런 한국인이 있다. 바로 차인홍 교수다. 지난 4월 방한해 소리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주최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한 그는 장애인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비장애인들에게는 사랑과 큰 감동을 선사했다.
각종 매체에 그의 성공 스토리가 소개되면서 그는 2003년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이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올 가을 발간될 두 번째 저서를 앞두고 최근 다시 모국을 찾은 차인홍 교수를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깔끔한 외모에 친절한 매너를 가진 그는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차인홍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걸어본 기억이 없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의 부모는 차 교수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대전 재활원에 그를 맡겼다. 먹고 살기 힘든 생활 속에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이별해야 했던 차 교수는 외로움과 배고픔 등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냉대 속에 배움의 기회조차 빼앗겼던 그는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지냈다. 그럴수록 마음의 문은 닫혔고, 가슴의 상처는 깊어져 갔다.
“11살 때 였어요. 대전에서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강민자 선생님이 재활원에 오셔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셨죠. 그 때 만난 바이올린이 저의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강민자 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차 교수는 1971년 열린 충청남도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그는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한 것이었다. 차인홍 교수에게 있어 바이올린은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위로’였다.
재활원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던 그가 넓은 세상, 더 나은 미래에 대해 꿈을 꾸게 된 것은 16살이던 1974년이었다. 재활원과 자매결연된 일본의 한 장애시설로 그는 1년 연수를 떠났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어울려 사회의 구성원으로 떳떳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휠체어를 처음 타본 것도 일본에서였다.
“충격이었죠. 일을 통해 돈을 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것. 노력하면 더 나은 환경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안에 도전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평생을 좌우할 만한 모티브가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차 교수는 1976년 강민자 선생의 후배였던 고영일 선생의 제안으로 베데스다 현악 4중주가 탄생되면서 장애인 청년 세 명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마땅히 연습할 공간이 없었던 그는 연탄광을 연습실 삼아 하루 종일 피나는 노력을 했다. 추운 겨울이면 살을 에는 바람으로 두 다리가 얼어붙었지만 그는 꿈을 향해 이를 악물고 도전했다. 꿈을 정하고 도전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유학이라는 길을 열어주셨다.
24살때까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아산재단의 추천으로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한 장애 소년이 미국 음대에 입학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정규학업을 거치지 않았던 그는 미국 유학생활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고난이 있었지만 역경을 이겨낸 것은 아내의 내조 덕이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차인홍 교수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온 아내 조성은 씨는 차인홍 교수가 라이트주립대 교수가 될 때까지 가발 공장, 재봉질, 피아노 레슨 등을 하며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두 아들을 성공적으로 키웠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지휘학으로 박사를 받은 차인홍 교수는 2000년 4월, 8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 주립대학의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용됐다.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음대 교수의 자리에 오른 영광의 순간이었다.
“1년 동안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7개월 동안 최종 결과를 기다리면서 ‘과연 나 같은 장애인이 정상인들과 경쟁이 될까’ 생각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연약한 저를 높여주셨습니다”
차인홍 교수는 연주 실력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도력을 인정받아 5년전 종신교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건강한 몸도, 든든한 부모의 지원도, 비싼 레슨 한 번 받아본적 없던 그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꿈과 비전을 주셨고, 그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높혀 주셨다. 이를 두고 차인홍 교수는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알게 해준 강민자 선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르칠 당시만해도 오늘날의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능기부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차인홍 교수는 지금 자신이 가진 재능을 지역사회와 장애인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왔다는 것이 나를 감동시켰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 내 인생의 전반기가 사랑받고 살아온 것이라면 후반기는 사랑하며 산 이야기여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