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교의 아버지 ‘중국 내륙선교회’ 창설
“천개의 생명이 주어져도 중국 선교에 쓰겠다”
변발·중국 옷 입고 복음 전파, 강한 영향력 끼쳐
1854년 3월 1일 수요일, 영국을 출발한 덤프리스 호가 항해 5개월 반 만에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덤프리스 호에서 내린 파란 눈의 한 영국 청년은 상하이 부둣가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양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족도 없이 홀로 중국 땅에 도착한 이 사람은 훗날 ‘중국선교의 아버지’라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약사이면서 평신도 사역자인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1791년 핀폴드 힐 지역에서 최초의 감리교회를 세우는 등 믿음의 가문이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뜨거운 신앙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17세 되던 날, 허드슨 테일러는 부친의 책상에 꽂힌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또한 중국 선교의 사명을 받고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의학공부에 나서게 된다. 작은 시골 의사를 보조하는 일을 시작으로 후에는 런던 병원 수련의로 일하며 절제된 생활, 믿음으로 물질을 공급받는 훈련, 중국어 성경으로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 선교를 위해 체계적인 준비에 나선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도착했을 당시 중국은 홍건적의 출몰로 정부군과의 전쟁이 일어나 곳곳이 불안했다. 재정적으로는 영국 선교단체로부터 후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허드슨 테일러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중국 선교’ 사명 하나만을 붙들고 믿음의 행보를 이어갔다. 허드슨 테일러는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많았던 상하이보다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내륙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외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유럽식 생활 방식을 벗어나 중국인처럼 머리를 변발하고 중국 현지인과 같은 옷을 입었다. 음식도 젓가락을 이용하는 등 중국인처럼 생활했다.
이런 모습을 두고 영국 선교단체에서는 우월한 영국인의 인품을 떨어트리는 행동이라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들을 사랑한다면 중국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진심은 중국인들에게 전해졌고, 그는 내륙 지방을 돌며 중국어성경과 전도 책자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
홀로 중국 땅에 첫 발을 내딛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1858년 중국에서 영국인 마리아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함께 내륙지방을 돌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열정적인 전도 여정으로 두 사람은 결핵에 걸려 치료차 영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휴식을 가지는 동안에도 허드슨 테일러는 산부인과 등 중국선교에 필요한 의술 과정을 익히고 신약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또한 효과적인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 내륙선교회’를 조직하고 내륙 지방 전도의 길을 준비한다. 영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34세 때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때는 중국 선교에 대한 뜻을 가진 젊은이들과 동행했다.
훗날 중국 내륙선교회는 영국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 선교회 지부를 창설하고 중국 각 성 마다 선교사를 파송해 복음의 횃불을 밝혔다. 중국 내륙선교회는 이후 이름을 OMF선교회로 변경하고 오늘날까지 중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 복음화에 주력하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복음전파와 의술 사역을 전개하는 동안 아내와 맏딸 그리고 막내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의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슬픔이 다가올수록 하나님만 의지하며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 많은 중국인들은 그러한 허드슨 테일러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새 삶을 살게 됐다.
50여 년 동안 중국 선교를 하면서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가족과 동료 선교사들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던 허드슨 테일러. 그는 수억 명의 중국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을 언제나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유명한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질지라도 중국 선교에 쓰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해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중요성을 심어줬다. 또한 남은 가족과 후대가 선교의 대를 잇게 만들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905년 6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토록 사랑했던 중국 땅, 마리아와 아이들이 묻힌 묘지 옆에 영원히 잠들었다. 묘비명에는 ‘허드슨 테일러,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