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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분열왕국 시대의 역사지리

솔로몬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

당시 엘리야·엘리샤·아모스 선지자 활동
이스라엘 백성 우상 숭배 종교적 타락 심해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은 북쪽의 열 지파를 중심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왕국은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북왕국의 영토는 9400평방마일로 남왕국 3400평방마일의 거의 세배에 달했다. 남북의 경계는 동쪽의 여리고에서 서쪽 지중해 방향으로 벧엘을 지나 게셀, 깁브돈, 욥바를 연결하는 선으로 구분된다. 북왕국의 수도는 세겜이었으나 국가 정세가 불안정해 부느엘에서 디르사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오므리 왕 시대에 사마리아로 천도했다.

 남왕국 유다는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이어 왕이 되었으나 세겜에서 북지파들을 규합하는데 실패하고 예루살렘으로 도망해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두 지파만을 다스리게 됐다. 르호보암 재위 5년(주전 918년)에는 시삭 또는 쇼솅크라고 하는 리비아인이 애굽 22왕조 창건 후 유다를 침략해 성전의 보물을 약탈했다. 그는 북왕국도 침략해 유린한 내용을 카르낙 비문에 기록했는데, 므깃도에서 시삭의 승전을 기념하는 석비편이 발견됐다.

 남북의 두 왕국은 유다의 아비야 왕과 북왕국 바아사 왕 때 전쟁을 하며 남북분단의 고통을 겪었으나 오므리 왕조 시대에 이르러 평화가 이뤄졌다. 오므리는 국경 수비대의 장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되었으며,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를 사서 수도로 삼았다(왕상 16:24). 그는 북쪽으로 시돈과 교역하며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그의 아들 아합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합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사적으로도 북쪽의 아람과 여러 번 전쟁을 하며 강성했으나, 종교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 엘리야의 책망을 받고 심판받게 됐다.

 엘리야는 요단동쪽 길르앗 디셉 사람으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가뭄을 선포했다. 3년이 지나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이게 하고, 경합을 벌여 패배한 그들을 산 아래로 흐르는 기손 강에서 처단했다. 그후 엘리사를 제자로 세우고, 길갈과 벧엘, 여리고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떨어진 겉옷을 이어받은 엘리사가 요단 강물을 치자 강물이 갈라지고 엘리사의 능력의 사역이 시작됐다.

 그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고,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치료하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을 기름 부어 새 시대를 이끌어가도록 했는데, 특히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서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다.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 2세 때 바알 숭배가 금지되고, 강대국 앗수르의 세력 약화로 인해 남북의 두 왕국은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몇십년이 지나면서 북왕국은 아모스나 호세아 선지자가 경고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혼란,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결국 앗수르의 세력이 다시 강화되면서 두 왕국은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게 됐다.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 성을 3년 동안 포위해 함락시켰으며, 그를 이은 사르곤 왕은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사로잡아갔다. 포로들은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수가, 메데 등에 흩어져 생활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옛 영토에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켰다. 그래서 혼혈민족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대부분 상실했고, 남왕국 유다 영토만이 조그맣게 남아 있게 됐다.
(목회·교육담당 부목사)

 

기사입력 : 2012.02.26. am 11:15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