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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십자가에서 실천하는 십자가로의 요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대속하신 고난은 더 이상 우리가 짊어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제 십자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죄는 십자가가 아니다. 세속은 십자가가 아니다. 질병은 십자가가 아니다. 저주와 가난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리고 죽음 그 자체도 이제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꺾어 버린 멍에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는 고통,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남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자처한 고난, 복음 때문에 남에게 핍박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순교, 그리고 매일 우리의 삶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수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틀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수학의 기호로 생각하면 플러스(+) 즉, 더하기를 의미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게 세워두면 플러스(+)에 머물지만, 누군가 짊어지면 곱하기(×)를 의미하는 표시가 된다. 숫자 중에 제로(0)와 자연수 일(1)을 제외하고 수학의 사칙연산 중에 곱하기의 결과는 항상 더하기보다 그 결과가 훨씬 크다. 예를 들면, 3더하기 3은 6(3+3=6)이지만이지만, 3곱하기 3은 9(3×3=9)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곱하기의 결과는 더하기에 결과보다 훨씬 더 커진다. 십자가 신앙의 정수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함께 지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결과의 크기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11절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도 우리 속에 나타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체험은 우리가 스스로 십자가를 걸머질 때 비로소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저주에서 속량된 자들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담대히 복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그리스도의 원하시는 바이며 또한 이것이 ‘순복음’이요 ‘절대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 새 시대가 요구하는 ‘순복음’의 새로운 ‘절대 희망’의 메시지는 ‘함께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회복이다. 이 시대의 위기는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 기독인들조차도 말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심으로써 우리가 선한 일을 넘치게 할 것을 원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라고 하셨다. 즉 기독교의 근본적인 생활 이념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을, 소망을, 기도를, 물질을 나누어 주고 무엇보다 남의 아픔과 수고, 고통과 슬픔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우리 자신까지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순복음의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기사입력 : 2012.02.19. am 11:25 (편집)
김에녹 목사기자 (henoch9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