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방에 갔다가 KTX를 타고 오는 데 옆자리에 젊은 부부와 5살 정도의 아들이 앉아 오손 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가 아들에게 “엄마 아빠 얼마만큼 사랑해?”하니까 그 귀여운 꼬마가 손을 양쪽으로 맘껏 벌리면서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엄마와 아빠는 그 아들을 서로의 가슴에 꼭 끌어안으면서 이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나도 그 사랑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돌아오는 내내 따뜻하고 행복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히 사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것에는 서투르다. 더욱이 사랑을 먼저 주는 데에 인색하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말이 있다. 먼저 주는 것 봐서 그만큼 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영어에는 ‘give and take’ 라는 말이 있다. ‘먼저 주고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기 전 나를 먼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시되 하늘만큼 땅만큼도 모자라 그 아들 보내 사 화목제물로 삼으시지 않았는가.
어느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의 콘서트가 있었다. 콘서트를 성황리에 끝마치고 복음성가 가수가 무대에 다시 나와 앙코르를 부르는데 의외로 찬송가 411장이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 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이 찬송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자 청중들 속에서 잔잔한 감동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찬송을 부른 가수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청중을 향하여 외쳤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하고 넉넉하지 않습니까?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렇다. 우리 성도들이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맛보아 알아가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그 행복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의 실천은 우리들의 몫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 1서 4:11) 라고 권면한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 후회 없이 내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라고 속삭여 보자. 이것이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아는 비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