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라크루아의 그림 모작, 자신의 것으로 승화   
광기가 아닌 신앙심으로 만들어낸 작품 세계 

 고흐는 좌절 속에 빛나는 불꽃이었다. 개인적인 삶으로 보면 고흐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삶은 절망의 밑바닥을 더듬거렸다. 화랑의 점원, 목회자와 같은 사회적 역할에서 뿐 아니라 사랑에서나 가정을 이루는 일에서도 모두 실패했다. 더구나 그는 어떤 형태이든 세상에서 말하는 광기라는 ‘정신파탄’의 간헐적인 위협에 시달렸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이며, 헤비스모커이자 동생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갈 수 있었던 무일푼의 가난뱅이였다. 

 그렇지만 역사상 고흐의 그림만큼 큰 감동의 울림을 줄 수 있는 작가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지 묻게 된다. 이처럼 영혼을 뒤흔드는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그가 당한 삶의 고통 중에서도 해바라기처럼 타오르는 미적 열망과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눈길과 감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고흐의 천재성이 그의 광기와 연계되어 논의되는 경향이 많다. 사실 그가 광기 발작 중에 그린 그림이란 없다. 고흐가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은 광기 때문이 아니고 광기라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기며 그림을 그렸다는 견해에 나는 동감한다. 고흐 자신이 느닷없이 광기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신이 온전할 때 그리고 정신착란이 닥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한 점의 그림이라도 더 그리려고 하였다. 

 고흐가 화가로서의 인생을 다시시작했을때 그가 이상으로 따르고자 했던 화가들이 밀레,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같은 신앙심이 깊은 화가들이었다. 그의 가계 배경이 목사인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대대로 경건한 금욕적 칼빈주의 가문이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고흐 자신도 깨뜨려진 유리처럼 파손된 생의 위기에 시달렸지만 그의 삶 속에도 깊은 신앙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 다루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고흐가 정신적인 파탄을 겪고 난 후, 생레미 요양원에 있는 동안(1890년 5월)에 그려진 것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그의 삶과 연결해볼 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는 원래 들라크루아(Delacroix)가 같은 제목으로 그린 것(1849∼1851년)을 모작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그곳에 있는 동안 들라크루아의 ‘피에타’, 렘브란트, 밀레 등의 여러 작품을 모사하였다. 사실 이런 걸작들을 모사한 것은 서양에서는 흔히 있는 것으로 이는 마치 바이올린 연주가가 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해석의 차이가 있다는데 착안했던 것 같다. 

 고흐는 우연히 모사를 시작했지만 그것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위안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들라크루아와 고흐는 그 색채감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또 그 신앙에서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고흐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을 모사한 데는 고독과 정신파탄의 무력감 가운데 누군가의 도움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눅 10:29∼37)의 비유는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는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상태인 채로 그를 내버렸다. 당시에 가장 존경받던 종교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곁을 지나면서도 이를 못본 척 피해갔다. 그렇지만 당시 천대와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 투숙까지 시켜주었다는 줄거리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원래 그림에는 이 사마리아인이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반면에 고흐의 것은 그 특유의 황금빛 노랑으로 대치되어 있다. 그러나 두 작가가 모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습자를 강한 어깨와 허리를 가진 사마리아인이 힘을 다하여 말 위에 올리는 장면이다. 피해자가 온 몸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간의 깊은 신뢰를 드러내 보인다. 왼편 멀리에 제사장이, 더 가까이에는 레위인이 걸어가고 있는데, 뒷배경의 산 계곡은 앞의 두 사람을 의식한 듯 뭉개듯이 처리되어 있다. 고흐는 종교화라도 회화적 관점에서 그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점을 이 그림에서도 십분 발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나는 이 그림에서 역동적인 고흐 그림의 힘과 빛나는 사랑을 느끼지만 동시에 성령의 비둘기가 화면에 가득 차게 날아오르는 듯한 소망과 기쁨을 또한 맛보았다. 그러나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지 2개월여 만에 자살의 길을 택했던 것은 그의 좌절이 얼마나 컸던 것인가를 다시 말해준다.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