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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적 축복]이원종 목사(관악대교구장)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신 선물

 

우리는 범사에 복을 누릴 수 있는 선택된 자
그러나 축복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돼

 

 

 이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은총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세대를 초월한 무한한 은총이다. 또한 이 은총은 부분적인 은총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환경의 구원과 육체적인 구원을 포함한 전인적인 은총이다. 요한3서 2절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하는 삼중축복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시는 전인적인 축복이다.

  삼중축복 중에 범사에 잘되는 축복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강건케 되는 축복 사이에 놓여있다. 영혼이 잘되는 복과 육체가 강건케 되는 복의 지지를 받고 있고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강건케 되는 축복을 온전케 하는 것이 범사가 잘되는 복이다. 

 영혼이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만 범사에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부평초(浮萍草)처럼 목적 없는 인생을 살다가 영원한 저주와 심판 가운데 멸망한 다면 이 땅의 부귀영화공명(富貴榮華公明)이 무근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육체가 강건해야 만 범사에 계획한 일들을 이루고 성취하며 누릴 수 있다. 건강을 잃는 다면 꿈꾸는 일을 행할 수도 없고, 설사 이미 이룬 것이 있다하더라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 영혼이 구원받고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과 저주 가운데 산다면 이 땅의 삶은 치고 힘든 삶이 될 것이다. 이러므로 이 세 가지 축복은 각각 별개의 축복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합된 축복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물질계를 먼저 지으신 후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에덴동산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각종 나무에는 실과가 풍성한 기름진 옥토였다. 또한 인간을 위해 풍성한 재화도 마련해 놓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예비하신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취함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이로 인해 범사에 부족함이 없던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다가오게 되었다. 범죄 한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가 주어졌고 하와에게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고 죽음이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기름진 옥토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황폐한 저주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와 고통, 수고로운 삶은 결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범사에 저주와 고통, 가난과 질병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는 범사의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 축복된 삶을 살아갈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성경은“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3:13∼14)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간의 모든 저주를 속량하셨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저주에서 속량된 자들이요 아브라함의 복에 거하는 자가 된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된 인간은 모든 저주에서 놓여야 구원받은 후사가 될 뿐만 아니라 환경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범사에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우주와 천지만물의 주인으로서 부요하신 자였지만 가난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참조)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가난에서도 이미 대속된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부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범사에 잘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런데 범사가 형통케 되는 복은 개인적인 것으로만 국한 될 수 없다. 삶의 부요와 범사의 형통의 복은 우리가 속한 사회와 민족, 국가와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회가 혼탁하고 부패된 상황에서, 나라가 극도의 혼란과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연의 생태계가 오염되고 파괴된 상황에서 나 하나만의 개인적 형통이나 부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범사가 형통케 되는 복을 받은 성도들은 개인주의적 신앙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축복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축복을 세상과 이웃과 나누어야한다.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며, 조국과 사회, 교회를 사랑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그들과 나눌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자이며 범사가 잘되는 삶을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기사입력 : 2007.07.12. pm 14:36 (편집)
정승환기자 (kg21@fg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