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적 통해 하나님 앞에 서게 돼
매순간 바른 행동 바른 선택 위해 기도

 3세기 말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자로 불린 플로티노스. 당시 학원과 길거리를 구분해 준 것은 단 한 장의 커튼이었다. 생각의 삐걱거리는 충돌, 열띤 토론이 오가는 ‘웅성거림’ 그 자체였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욕설에 일가견 있는 매춘부들에게 욕설을 던지는 것으로 철학 수업을 시작했다. 고대 철학자들의 언어는 매우 다양했다. 대화, 연설, 시, 우화, 성명서, 잠언, 심지어 욕설과 비방까지. 19세기 들어 대학 강의실이 생기면서 철학 언어는 매우 빈약하게 됐고 이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일까. 말이나 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색하는 것은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지난해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새롭다’(예영커뮤니케이션)를 출간한 이석우 장로는 이런 점에서 독특함을 지닌다. 그는 교수이자 서양사학자다. 서양사 중에서도 ‘고중세 지성사’가 주요 연구 영역이고, 그 중에서도 중세의 신학적 이념을 세운 ‘아우구스티누스’가 전공이다. 이렇게 서양 정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그에게 연구실 밖의 또 다른 관심영역이 있다. 바로 미술이다. ‘명화로 만나는…’은 그가 이 관심영역에서 열렬히 사랑하고 흠모해온 작품을 엄선하여 역사, 문화, 신앙과 신학의 측면에서 조명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건을 그려 낸 작품들에 곁들인 이 장로의 해설과 묵상은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새롭다’는 책의 제목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자체로서 빛나는 권위를 지니는 성경의 가르침들이지만, 그것들이 위대한 거장들의 명화와 만날 때 주는 감동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 장로는 “이제와 돌아보니 좋아하는 두 가지(그림과 역사)가 닮은꼴이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역사가 사라진 과거의 망각과 상실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미술 역시 순간으로 사라질 아름다움을 화면에 잡아두는 반(反)시간적인 것이라고.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일이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부여한다면 바로 ‘탐구’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사실들의 나열이라기보다 의미를 연구해 부여된 사실이다. 역사 연구자들은 합리적인 이해와 서술을 목표로 역사에 접근한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객관적이고 설명 가능한 자료에 따라 서술한다. 그렇기에 서술 방법은 반드시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 이해는 다르다. 성경말씀을 기반으로 모든 역사의 원인을 하나님께 둔다. 사건의 의미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찾는다. 일반 역사가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역사 이해는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 성경과 역사의 만남을 시도하며 이 장로는 일반 역사와 기독교 역사의 이해 관계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역사를 세상적인 이해 없이 그 동인의 절대화나 계시적 접근으로 구성할 때 지나친 주관주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 밖의 힘을 상정하지 않고 역사를 보노라면 그 무목적성과 맹목성에 두려움마저 느껴진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며 그의 역사를 보는 중요한 전제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는 잠언 16장 9절 말씀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에게 신앙적으로 특별한(?) 체험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물어보니 대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책에 묻혀 살았기 때문일까. 덧붙인 그의 답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삶과 신앙을 ‘일상스러움의 기적’이라고 했다. 풀이를 요하자 그는 “인생을 돌아볼 때 삶의 굴곡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그의 삶과 신앙, 역사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젖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을 향해 서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그 역시 문제와 갈등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고 느끼게 된 것은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런 믿음이 견고해지며 그의 기도는 ‘문제해결’에 대한 간절한 부르짖음에서 ‘매순간 바른 행동, 바른 선택을 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한 순간에 이렇게 바뀌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일상에서의 은혜가 반복되며, 그리고 그가 그런 것을 인식하게 되며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이 장로는 백지를 꺼내 ‘하나님의 은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종이는 오래지 않아 다 차버렸고, 그는 파일 보관함을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정리한 종이를 모아두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파일 역시 다 차버렸고 그는 파일의 제목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묶고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이 장로는 작은 일 하나 하나를 감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보니 우리가 늘 접하지만 그 존재와 고마움을 쉽게 잊는 해와 달, 공기, 물, 꽃과 풀 등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듣고 보니 그가 앞서 말한 ‘일상스러움의 기적’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가랑비처럼 그의 삶을 적셨다. 그래서일까. ‘삶에 있어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기억과 망각’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선한 곳으로 가도록 우리의 기억을 훈련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장로는 “가장 나쁜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신앙”이라며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날마다 이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장로로서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느끼는 아쉬움도 덧붙였다. “우리는 흐르는 물에 새겨 잊어버려야 할 것과 돌판에 새겨 기억해야 할 것을 바꿔 은혜를 쉽게 잊고 원수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