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건’
신분에 맞는 말과 행동 할 때 교회사역도 가속
겉으로 보기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권세 있는 사람의 추천서나 사인을 가지면 사람들은 달리 본다.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암행어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듯 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그가 위풍당당한 것은 임금의 어인이 찍힌 마패를 품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준 마패만 있어도 엄청난 권세를 갖는데 하나님의 사인이 심령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면 그는 얼마나 귀한 사람이겠는가. 문제는 망각이다. 사단은 우리 신분을 잊게 하는 ‘묘약’을 가지고 있다. 망각은 때때로 슬픔을 잊게 하는 좋은 작용을 하지만, 삶의 문제와 복합작용을 벌이며 신분까지 잊게 한다.
성경은 우리 신분을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잊는다. 신분을 망각하니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덕분에 교회에 발을 담그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거룩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최근 모 교회 중·고등부 담당 목회자로부터 “이번 겨울방학에는 금연학교를 열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교회 목회자의 말이지만, 과연 남의 일로만 볼 수 있을까? 실상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단 청소년들의 흡연문제 뿐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버려야 할 것과 챙겨야 할 모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경건이라고 하면 앞서 사례를 든 것 같이 금주와 금연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 의미의 경건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경건은 이를 뛰어넘는 적극적 의미의 경건이어야 한다. 경건이란 ‘두려움에 대한 선한 응답’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건이다.
이런 마음을 회복한다면 우리 모습 속에 경건이 살아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족속답게, 왕 같은 제사장답게, 그의 소유된 백성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서로에 대한 ‘예절’과 ‘존중’은 강조할 필요가 없다. 또 그렇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교회에 나와 상처받았다는 사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경건은 울타리와 같다. 경건이 없으면 교회와 세상의 구분은 없어진다. 그런 교회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교회는 경건 때문에 세상과 구별된다. 단 경건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한결 같이 주님을 닮아 가는 훈련을 쌓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주님을 발견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