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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62-바울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용장

바울(작은 자)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진리를 기록한 분이다. 신약성경 27권 중 ‘로마서’를 비롯해 ‘빌레몬서’까지 13권을 쓴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초기에 그저 예루살렘 중심으로 팔레스틴 지방에서만 전해지면서 ‘유대교의 나사렛파’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그것이 로마로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명실공히 세계의 교회가 되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활동과 지도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바울은 본래 유대교인이었으며 기독교에 대해 격렬하게 박해를 한 사람이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때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하였다”(행 8:1). 이 사울이란 바울의 히브리 이름이며,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다. 성경에 바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사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 다소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문이 로마 정부에 대하여 상당한 공훈을 세웠든가 아니면 돈을 많이 들여 샀을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점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가정은 지위나 재산이 있는 상류의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에 대해 ‘귀족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난국에 처했을지라도 그는 “나는 로마인이다”라는 긍지와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시민권 때문에 몇 번이나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아 박해로부터 벗어나 바라던 대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가 질서를 중시하고 권세를 잡은 자에게 복종할 것을 역설한 것도 그의 시민적 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새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빌 3:5,6)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삶과 사상에는 유대 민족의 피와 전통 그리고 신앙이 뿌리깊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소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헬레니즘 문화(기원 전 4세기로부터 기원전 1세기경까지의 약 300년간의 그리스 로마 문화)의 한 중심지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동서 문화가 모인 문화적 도시였다. 거기서 자란 사울이 그리스어를 말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교양 중심은 아무래도 유대교였다. 그는 엄격한 유대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을 배웠다(행 22:3). 예루살렘의 교육은 그를 열렬한 바리새파 유대교도로 만들었다. 아울러 절대적인 유일신의 신앙, 엄숙한 윤리, 뜨거운 애국심 그리고 율법에 대한 충성이었다. 따라서 사울은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몇 년을 예루살렘에서 지냈는지, 또 수학을 끝마치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의 수학 후 고향 다소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기독교가 “성소와 율법을 거스려 말하는”(행 6:13) 언동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형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율법에 비추어서 용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젊은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그런 사울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어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복음선교에 생애를 바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김경문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장

 

기사입력 : 2005.06.14. am 09:21 (편집)
오정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