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은혜, 신유의 47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많은 것이 우리네 과거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바뀌었을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창립 47주년을 앞두고 돌아본 우리교회 역사는 아쉬움 보다는 다행스럽다는 표현이 꼭 맞다. 유학준비에 한창이던 조용기 전도사가 최자실 목사와 함께 1958년 5월 18일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이날 예배는 동네 곳곳을 다니며 알린 것에 비하면 초라했다.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전도사, 그의 세 자녀(김성혜 한세대 총장, 김성수 목사, 김성광 목사)와 밭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려고 온 할머니 뿐이었다.
우리교회가 세인들로부터 주목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난 후였다. 7년 동안 중풍병을 앓던 무성이 엄마를 만나면서부터다. 몇시간의 기도 끝에 무성이 엄마가 벽을 잡고 일어서 걸었다. 굉장한 입소문을 타더니 결국 최자실 전도사의 거실에서 더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61년 9월 1일, 서대문 로타리 서커스단이 자주 머물던 터에서 천막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강사로 초청된 샘 토트 목사의 통역에 조용기 전도사가 나섰다. 부흥성회 기간 중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서대문에서의 교회 개척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15일 부흥회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다. 순복음부흥회관이었다. 1962년 4월 26일 조용기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5월 13일 순복음부흥회관의 명칭은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었다. 교회 성도는 이미 5백 명을 넘어서 1964년에는 3천명까지 이르렀다. 1964년은 조용기 목사가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첫 해외선교여행을 떠난 해다.
성도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가자 새로운 교회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비행기 이착륙 활주로로 이용되던 여의도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여의도는 황폐한 섬으로 교통편도 없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답은 조용기 목사의 강력한 추진력에 불가능한 여의도행이 진행됐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에 보면 건축시작부터 큰 문제에 봉착하자 조용기 목사는 녹슨 철근 앞에 쓰러져 천국가고 싶다며 하나님께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성도들이 몰려들면서 1973년 8월 19일, 현재 여의도에 있는 성전에서 감격스런 첫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우리교회의 여의도 시대는 이렇게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전제직, 전성도들의 강철같은 믿음, 그리고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 외 전교역자들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그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