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새벽을 깨운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26세의 청년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인천부두에 한국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광혜원에서 일하며 한국어를 연마한다.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의 새벽을 깨우는데 지대한 역할했다. 경신중고 및 연희학원을 설립하여 신교육의 터전을 닦았으며, 조선 장로교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많은 저술을 통해 한국을 해외에 소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사역중 으뜸은 한국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새문안교회의 설립이다. 서울 광화문 신문로에 있는 새문안교회는 1907년에 옮겨온 곳으로 이 교회의 처음 자리는 큰길 건너편 현재의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 자리다.
당시 앨런 선교사의 집 오른쪽이며 옛날 강로 정승의 집이다. 언더우드는 이 집을 얻어 안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사랑채가 바로 교회의 시발지였다. 그래서 처음에 교회이름도 ‘장로교 정동교회’라 했다.
1887년 9월27일 가을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있던 서울신자 등 14명이 이 집에 모여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렸으니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다.
한편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 영국 고아학교 형태의 ‘예수교학당’을 열고 학비에 의복과 음식까지 주면서 한글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이후 구세학당으로 바뀌었으며 1901년 연동으로 교사를 옮겨 경신학교라 하였으니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888년 늦은 봄 항간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아이들의 눈알을 빼서 안경 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어 약을 만든다’는 허무맹랑한 낭설이 나돌았다. 키가 크고 눈알이 파란 서양인들은 하루아침에 양도깨비가 되었고 성난 군중이 두려워 바깥출입도 삼가야할 형편이었다. 당시 광혜원에서 일하고 있던 호튼 양도 이 때문에 가마꾼들이 다 도망가 버려 당황해 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히 말고삐를 잡고나선 총각이 바로 병원 일을 보고 있던 언더우드였다. 1년 후 그들은 결혼을 약속했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함께 전도여행 겸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임진강나루를 건너 오두막 주막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고 구경꾼들의 놀림과 위협도 감내하며 의주에 이르렀다. 아직도 선교가 자유롭지 못하던 때, 국경인 압록강에서 의주 교인 3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국의 요단강 세례’다. 이 오지 순회전도여행은 초기 한국교회 선교의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
글·이소흔/사진·김용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