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난연재 다시보기
승동교회


우리나라 민중교회의 원조

 승동교회는 1893년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가 세운 곤당골예배당(현 소공동 롯데호텔 뒷편)에서 시작된다. 무어 목사는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백정 등 천민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이 때문에 승동교회는 ‘백정교회’로 불리기도 했다. 1895년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양반계층이 홍문섯골교회를 세워 나갔다가 1899년 가을 다시 합쳤고 1905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1939년 이곳에서 지금의 한신대학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개교된다.
 한국초기교회에는 사회에서 천대를 받던 백정, 기생, 광대 등 소위 칠천역들이 많았는데 특히 승동교회는 백정 해방운동을 선도했다.
 백정 박성춘, 자신은 비록 천한 무식쟁이였지만 자식만은 공부를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아들을 곤당골 예수교학당에 입학시켜 결국 자기도 기독교인이 된 인물. 박성춘이 콜레라에 걸리자 아들은 무어 선교사의 친구 애비슨(고종의 어의)에게 치료를 부탁한다. 콜레라가 치료되자 박성춘은 회심하고 전도에 나서 서울 수원 등지에서 수백명의 백정에게 복음을 전하고 정부를 상대로 백정인권운동인 ‘형평운동’도 벌였다. 애비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백정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1911년 박성춘은 승동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된다. 아들 서양은 세브란스 의전을 1회로 졸업,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엔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했다. ‘예수 믿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은 백정 박가’의 집안에서는 많은 학자 의사 교육가 등이 배출되었다 한다.
 승동교회는 일제시대 때 민족운동의 큰 역할을 한다. 당시 이 교회에는 연희전문의 학생대표 김원벽이 다니고 있던 관계로 1919년 2월 20일 전국의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교회 지하에 모여 조국 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 거사 직전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1500매가 학생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 만세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해냈다.
 1912년 준공하고 1958년 증축된 교회당은 2001년 3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130호로 지정됐다.

글·이소흔/사진·김용두 기자

 

기사입력 : 2004.12.25. am 11:43 (편집)
복순희기자 (lamond@fg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