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 승리와 평화, 안전 상징
초기 기독교 미술 하나님 형상 표현 자제
4세기부터 황제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
1. 마리아
로마 세계에서 권능 있는 여인들의 상징은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그림이나 조각, 길거리의 제단에 묘사되어 있다.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는 동정녀 마리아가 대부분 비너스가 있던 곳에 나타난다. 마리아는 콘스탄틴 이전에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나타날 때는 아기 예수님을 무릎에 누인 모습으로나 동방박사를 맞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릎에 예수님을 누인 마리아의 모습은 로마에 유사한 상징이 없는 반면 이집트에는 호루스를 무릎에 앉힌 이시스 여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로마 사람들은 어머니 신인 이시스가 그 아들 호루스를 보호한다고 여겼다. 상부 이집트에서 호루스는 그의 오른쪽 눈이 태양을 나타내는 하늘의 신이다. 마리아도 새로운 호루스인 어린 예수를 보호하는 어머니로 묘사된다. 현자들인 동방박사들은 새로운 태양신인 예수님께 복종하는 미드라교의 사제를 상징한다.
2. 십자가
십자가는 고대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상징으로 거의 모든 문화에 존재하고 있다, 장례의식에서 십자가는 흔히 악한 세력에 대한 방어를 뜻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십자가인 앙크(ankh)는 입에서 나오는 모습으로 생명이나 숨을 상징한다. 이집트형 십자가는 아래는 십자형태이고 위는 둥근 고리 모양이며,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신들이 손에 들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의 보편적인 사용과는 반대로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십자가는 드물게 나타날 뿐 아니라 고난을 상징하는 새로운 의미로 정의되지도 않는다.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관된 상징으로는 콘스탄틴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확실하게 기독교적 십자가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기 직전에 밀비아 다리에서 환상을 보고 만든 황제의 군기에서였다(312년). 그는 꿈에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그 모습을 군기에 표시를 하고 전쟁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콘스탄틴 이전의 십자가로 제시되는 유물로 몇 가지가 있다. 1938년에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했을 때 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그 집의 2층 방에서 십자가 형태를 보이는 얼룩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벽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십자가가 화산재에 덮여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하나는 1856년 로마의 팔라틴에서 어떤 사람이 오른손으로 십자가에 달린 당나귀를 가리키는 그림과 글자가 왕궁의 종들이 사는 방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글자들은 “알렉사메노스, 하나님을 경배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렇게 품위가 떨어지는 그림과 글자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었다고 증명하기도 어렵다.
명백하게 예수님이 달리신 최초의 십자가 모습은 5세기에 속하는 로마의 사비나의 문과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상아로 만든 관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죽어가고 있거나 고통받는 모습이 아니다. 그의 두 눈은 크게 떠 있어서 오히려 그는 십자가를 정복하는 모습이라고 주장된다. 초기 기독교시대에는 보호의 십자가나 상징적 십자가가 나타나는데 반하여, 선교적인 십자가는 결코 찾을 수 없다. 초기의 상징적 십자가는 고난이나 죽음, 자기희생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승리와 평화, 역경 앞에서의 안전 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유사한 현상을 예수님의 형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3세기에 속하는 예수님의 형상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초상처럼 고난을 대속하고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3. 하나님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 미술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림은 없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묘사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유대교의 제2계명에서 형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뿐 아니라(출 33:20), 형상을 만드는 자체가 우상숭배로 간주되는 것이 구약적 신앙이었다. 그러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관념은 신약시대에도 계속되어서 예수님의 세례와 변화산상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를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다(요 14:9).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런 취지의 설교를 하였다(행 17:29). 이와 같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이 초기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적 형상을 표현하지 못하게 했다고 여길 수 있다. 둘째로 2세기말과 3세기 기독교문학에서 변증가들이 신전과 기념물에 만든 신들의 형상을 공격한 사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신화적인 신들이 아니라,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박해와 순교를 기꺼이 받았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은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황제숭배에 대한 반대가 주요한 이유였다.
그러다가 4세기말에 가서야 비로소 소수의 기독교 조각가들이 하나님을 로마의 신들처럼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왕관을 쓰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모습의 예수님이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