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는 세계관과 문화 바꾸는 작업
잘못된 신관, 인간관 성경적 문화로 바꿔야
세계관에 따라 복음 받아들이는 모습 달라
인도 마드라스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윤식 선교사님은 어느 날 힌두교를 믿는 여학생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 그 여학생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선교사님은 정기적으로 그 여학생과 시간을 정하여 함께 성경을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 선교사님은 자연스럽게 그 여학생에게 이 복음을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전하라는 권유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학생이 희색이 만연하여 선교사님을 만났다. 그러면서 오늘은 드디어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선교사님은 누구에게 전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은 진지하게 바로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전도를 했다고 했다.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의 눈빛을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전생에 사람이었던 것 같고 또한 다음 후생에는 사람으로 환생할 것 같아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
이 얘기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세계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세계관은 복음을 담는 그릇이다. 기존의 세계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진다. 한국인들은 무속적으로 복음을 이해하는가 하면 일본인들은 신도(神道)라는 그릇 속에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과정에는 반드시 선교대상 지역의 세계관을 공부하는 ‘문화인류학’ 등의 강의가 개설되고 있다.
세계관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문화라는 형태로 표출, 실현된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결국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넓게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서로 다른 세계관과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관적, 문화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복음의 핵심이 흐려지는 데까지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엄연히 복음 속에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매우 분명한 메시지가 들어있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라는 구체적인 명령이 있다.
복음 속에는 타락한 인간의 세계관, 문화와는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죄악 된 행동이나 관습이 세계관이나 문화의 차이란 말로 변호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악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은 문화요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게으름이나 거짓말,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문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적 방종이나 동성연애를 생활양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우상숭배를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문화는 존중되어서는 안 되며 정죄되어야 한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죄악 된 문화는 미화되거나 존중되어서는 안 되며 배격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동물로 환생(還生)할 수 있다고 믿는 힌두교도들에게는 그것이 잘못된 신관, 인간관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주어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선교는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이요, 나아가서는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다.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나 다른 강대국들의 문화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문화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관적 관점으로 본다면 개인이나 민족에게 있어서 성경적 세계관과 문화로의 변혁이 일어날 때 온전한 선교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관적 변혁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에게 전도한 인도 여학생의 ‘순진함’은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선교에 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