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신학과 전통의 기원 밝히는데 기여
바울 선교 130여 년 후 기독교 상징 언어 등장
로마 학파 해석 틀…성서 교부문헌 연관 중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교회나 공공건물을 건축하지 않고 그들의 가정에서 모였으며, 기존의 문화를 수용했을 뿐 새로운 기독교적 이미지는 없었다. 그것은 초창기의 기독교가 아직 기존 사회와 크게 구별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상징과 언어, 예술, 건축 등과 뚜렷이 구별될 만한 충분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의식주와 예배, 매장, 결혼, 매매, 기록 등에 있어서 기독교적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러한 관심이 1∼2세기의 교부문학에 주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비문학적인 기록에서 초기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찾기는 자료의 부족으로 극히 어려우며, 고고학의 발견물도 있지만 비기독교인들의 유물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80년경에는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상징과 언어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이 기독교를 세계화하기 시작한지 1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후 기독교적 상징과 미술, 문자, 매장관습, 건축 형태 등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미약한 상태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초기 비잔틴 시대가 되서야 기독교적 유물과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다.
1. 초기 기독교 고고학의 역사
성서고고학이라고 하면 팔레스타인 고고학을 연상하듯, 기독교 고고학이라고 하면 로마를 먼저 언급하게 된다.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로마에만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초기 기독교의 고고학 연구가 로마화되고 로마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결부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로마의 초기 기독교 고고학은 1632년에 안토니오 보시오의 저서로부터 학문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그의 연구는 개신교의 이단성을 공격하는 무기로써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카타콤이 로마 가톨릭의 존재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 등이다. 본격적인 초기 기독교 고고학은 19세기에 들어와 마르치와 드 로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또한 바티칸 교황청에서 1757년 초기 기독교 유물을 모아 놓은 박물관을, 1852년에는 고고학 위원회를, 1925년에는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청의 후원에 힘입어 유럽에 초기 기독교 고고학 학파가 형성되어 여러 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자들과 연구소의 활동이 계속 저널로 출간되어 오늘날까지 중요한 전문잡지로 지속되고 있다. 또 그러한 연구자료들이 여러 종류의 사전과 백과사전, 카탈로그 등에 모아져 출판되었다. 이러한 백과사전과 카탈로그의 자료가 누적됨에 따라 초기 기독교의 고고학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로마 중심의 초기 기독교 고고학 연구의 틀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학파는 초기 기독교 자료를 교부문학과 초기 교회 전통에 의해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에 몇 가지 새로운 해석방법의 등장과 함께 초기 기독교 유물을 지중해 세계의 문화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나 주목을 끌고 있다.
2. 해석 방법론의 문제
로마 학파는 고고학 자료를 해석하는 고정된 틀을 수립해 놓았다. 첫째 모든 자료는 성서와 교부문헌에 연관되는지 검토해야 한다. 다음으로 자료 모음책의 참조를 거쳐야 한다. 그런 후에 고고학 자료는 문헌의 구조 속으로 정돈되게 된다. 문헌에 없는 고고학 자료는 문헌을 재구성하는데 사용되고, 고고학적 유물들은 전통을 보충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문헌과 고고학 자료가 상충될 경우 문헌 전통이 우선된다. 그러한 로마학파의 해석법은 첫째로 전통의 연속성이 전제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즉 초대 교회의 귀족적 회심자들의 전통이 가정교회로부터 시작해서 박해시대의 카타콤 건설, 콘스탄틴 시대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1세기의 교회지도력과 신학적 전통이 4세기까지 직접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자료는 2세기말에 가서야 나타나므로 그러한 견해가 고고학 자료에 의해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학설이다. 둘째로, 로마학파의 해석은 후대에 가서야 명확하게 나타나는 상징적 의미를 과거의 자료에 투영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후대의 상징은 과거에 있던 상징의 연속적인 발전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자료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심각한 잘못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먼저 자료의 연대를 파악하여 유물 상호간의 시대순서를 결정하고 다음으로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초기 미술품에 후대에 생긴 베드로의 전통적 의미를 투영시킨 많은 경우가 나타난다. 유사하게 로마학파에서는 미술품의 배경을 교회적 의미에서 해석함으로써 미술품 당시대의 사회 배경적 의미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고고학의 해석적인 오류는 성서고고학이 성서의 내용에 비추어 고고학 자료를 해석하던 초기 성서고고학의 잘못과 유사하다. 그것은 성서고고학과 초기 기독교 고고학은 모두 성서와 교부문헌과 교회문서라는 거룩한 문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한편으로 초기 기독교 고고학은 교회의 신학과 전통의 기원을 밝히는데 기여하였다. 수세기 동안 교회사가들은 초기 기독교회가 처음에는 순수했으나 점차 신앙과 관습이 훼손되어 이단적 분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우어에 의하면 오히려 콘스탄틴 이전시대에 교회는 다양성을 가졌고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 없었다. 정통은 다양한 기독교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며, 이단은 그중 억압된 형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점차 획일화되고 교리화 되어 가는 것과는 반대로, 기독교는 비기독교적인 사회관습도 차용하게 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식사가 순교자의 축제가 된 것과 로마의 태양력에 따라 성탄절을 동지에 맞춘 것, 유대교의 음력의 영향으로 부활절을 보름이 지난 후로 계산하는 것 등은 기독교회가 기존문화와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순복음신학원 학장, 한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