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 체험케 하는 성경적 신학
성령사역과 역할의 중요성 강조
삼위일체론 환형적 관계로 봐야
순복음성령신학은 신학함이나 신학의 여러가지 주제들을 접근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나 역할의 중요성을 마땅히 강조한다. 이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기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삼위일체론 이해의 특징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은 성령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이해의 한 가지는 삼위의 관계를 종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림1>에서 보는 것처럼 성부가 맨 위에 있고 성자는 그 아래, 성령은 또 성자 아래 있다. 이런 삼위일체 이해에서 성자는 항상 성부보다 아래에 있고 성령은 항상 성자에 종속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야웨 하나님이 먼저 계시되고 신약시대에 성자 하나님이 오셨고 교회사 시대에 성령 하나님께서 나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한 삼위일체 이해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속사 가운데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치를, 계시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순위 매긴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종적 이해는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인식의 순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하)고 하셨다(요 14:9하 참조). 마찬가지 논리로,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구주로 알 수가 없다(요 15:26).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인식론적 순서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순복음성령신학이 이해하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종적(縱的) 관계가 아니라 환형(環形) 관계이다.
흔히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의 주제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허용된 사건이며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과 은혜에 속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 또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런 한편 루터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또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으로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성경 해석의 제일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두기가 어렵다.
이들과는 달리, 성령의 사역과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성령 하나님을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해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순서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세례를 언급하는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점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도에 의하면, 성자가 먼저 나오고 성부가 그 다음이며 성령이 맨 나중에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요 1:14∼17). 성자 예수님의 나심의 배경에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요 3:16),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길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그러므로 축도에 나오는 삼위일체의 순서는 성자, 성부, 성령이다. 그런데 비하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 성자, 성부의 순으로 언급되어 있다(4∼6절). 왜냐하면 교회라는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집을 짓는 도구(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일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라는 집을 짓는데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최종적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성부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이 여기서는 맨 마지막에 언급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성령의 사역과 역할을 마땅히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삼위일체의 구조를 <그림2>와 같이 환형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삼위일체의 환형적 이해는 기독교의 신학이 편협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체험케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성령을 신학적 탐구와 신앙적 체험의 출발점으로 삼는 순복음성령신학은 결코 우리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성령 일원론(Unitarianism)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게 해 주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신학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새신자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