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축복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 개념 내포
구원은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야
영혼구원, 우주만물들까지 회복되는 역사 기대
순복음 신학의 구원론은 영혼구원만을 주장하는 단편적인 신학과는 달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함을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 혹은 “전인구원의 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인구원의 순복음 신학은 그 신학적 기초를 성경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세주(savior)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신다. 그 분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사(마 28:18)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오늘도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유의 왕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주되심(Lordship)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또한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요 14:16).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인적 구원에 이르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이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위에 탄생한 순복음 신학의 삼중축복의 교리는 가장 성경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설명되기도 하는데(막 10:24∼26), 그렇다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만큼이나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19장 28절 “세상이 새롭게 되어” 나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의 말씀 가운데서 제시되는 구원의 개념을 통하여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는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구절들 속에서 구원이란 우주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신자의 영혼을 지옥불에서 끄집어내는 사건만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측면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함께 신자의 육신도 새로워질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와 사회와 만물이 모두 죄와 고통과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워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사건이다(롬 8:19∼23).
삼중축복과 전인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복음전도의 목표와 비전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잃어서는 않되지만, 거기서만 머물지 말고 영혼구원의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차원 그리고 온 우주 만물들까지도 회복하며 새롭게 하는 사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 구원관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의해 그 의미가 상당히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와 병폐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원론적 사고는 영과 육을 서로 대립되는 원리로 이해한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따로 있으며, 육적인 일은 영적인 일에 비해 열등하거나 적은 가치만을 가진다. 영적인 일은 거룩하지만 육적인 일은 세속의 일일뿐이다.
교회 일은 거룩한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일은 그러하지 못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 바깥의 세상(범사의 형통)을 등한시하게 하며 육적인 일(강건함)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다.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육신을 정죄하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편향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땅의 삶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며, 범사의 형통과 육체의 강건함 보다는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런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상대화하며 소위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 버릴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일면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육신적인 일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이 땅에서의 전인적 구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예배와 생활의 괴리가 오고, 신앙과 삶의 분리가 오게 된다.
오늘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그 믿음은 또한 온전한 삶보다 전인적인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부분을 간과하여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게 하는 (도구적)수단인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하는” 전인적 구원관으로 인도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복음 신학이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세대 신학부 신문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