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중독증후군과
호모쇼퍼홀리쿠스의 등장

 얼마 전 일간지에 흥미로운 외신 기사 한 건이 보도됐다. 영국의 정신질환 전문가들이 충동 구매 심리를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공식 인정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충동구매 치료가 건강보험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뉴스를 접하면서 필자는 IMF때보다 경제가 더 어렵다는데 과연 우리나라에도 이렇듯 무분별한 쇼핑을 일삼는 계층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소비자보호원이 TV홈쇼핑 이용자들의 구매행태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접한 후 우리 주변에 쇼핑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사결과에서는 홈쇼핑을 통해 물건을 구입한 소비자 중 33%가 구입 계획 없이 충동구매를 했으며, 4% 정도는 쇼핑중독수준에 이른 집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위험 집단 중 여성이 94%를 차지했으며, 평균 연령은 35.7세였다.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가 많았으며, 주부가 절반을 넘었다.
 어느 지하철역 광고판에는 ‘아줌마는 홈쇼핑없이 살 수 있어요?’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을 정도다. 이른바 ‘홈쇼핑 전성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나게 해주는 카피라이팅이다. 우리나라의 홈쇼핑업체는 인포머셜(케이블TV에서 홈쇼핑 방식으로 광고하는 기업)을 포함할 경우, 수백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업체는 LG, CJ, 현대, 우리, 농수산홈쇼핑 등 5개이다. 이들 홈쇼핑에선 그야말로 사람 빼곤 다 판다. 간고등어에서 프랑스 자동차 페라리까지, 기저귀에서 노트북까지, 쌀에서 된장까지 홈쇼핑의 식성은 정말 놀랍기만 하다. 심지어 콘도나 골프회원권 같은 부동산 상품, 진돗개 같은 살아있는 동물, 수의나 납골당 같은 것들도 홈쇼핑 판매목록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홈쇼핑의 화려한 발전 이면엔 그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은 앞서 말한 것처럼 충동구매의 확산과 이로 인한 쇼핑중독의 만연이다. 충동구매가 반복되다보면 더 이상 충동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 즉 쇼핑중독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홈쇼핑 중독자의 특징은 가전·컴퓨터·생활용품 등 보다는 의류·보석·장신구·식품류 등 반복 구매비율이 높은 상품을 주로 산다는 점에 있다. 특히 본 상품보다도 사은품이나 경품이 풍성할 경우 폭발적인 구매력을 유발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홈쇼핑 업체간 과열, 과당 경쟁은 홈쇼핑 중독자를 양산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치열한 판촉전과 함께 사은품과 경품이 늘어나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품도 속속 선을 보이며 고객들의 구매심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핑중독증은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사들이고, 쇼핑이 불가능해지면 심리적, 육체적 부작용에 시달리는 상태를 말한다. 한번 구매 충동이 오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마구 사고, 산 물건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면서 쇼핑이 불가능해지면 짜증을 내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쇼핑중독증 환자들은 물건을 사기 직전엔 긴장이 되다가도 일단 사고 나면 속이 후련해져 쇼핑을 멈출 수 없다고 호소한다. 정서불안, 소화불량, 두통 등에 시달리고 심하면 약물의존, 식이장애, 우울증 등에 빠질 수도 있다고 의료진들은 경고한다. 때때로 헤어날 수 없는 쇼핑중독증은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2월 우울증과 쇼핑중독증으로 5000여 만원을 날린 한 20대 여자가 자신을 꾸중하며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는 이유로 친어머니를 청부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미국의 미디어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는 자신이 제작한 포토몽타주에서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소비하지 않는 사람을 반사회적으로까지 여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화를 풍자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이를 구매하는 모더니즘적 소비단계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적 소비행태는 구체적 상품이 아닌 상징, 그리고 이를 통해 욕망을 소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 소비는 단순한 상품유통에서 인간 존재와 행위, 욕구를 설명하는 문화적 코드가 됐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일종의 의사소통 구조라고 해석하기도 한 소비는 온라인 세상에서 그 폭과 속도가 한층 더 넓어지고 빨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제가 바로 홈쇼핑 시스템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체가 삶의 목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소비행위로부터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모든 것이 상품화(commodification)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는 간데 없고, ‘호모 쇼퍼홀리쿠스(Homo Shopaholicus·쇼핑중독인간)’만이 남아있는 듯하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wpark@kb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