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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허스톤 목사가 본 조용기 목사와~(6)

서대문 교회 건축후 급성장 이어져


비전의 사람, 조용기 전도사

 며칠 뒤, 내 이동식 주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 전도사가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기도해 보았는데, 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선교사님과 서대문으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최자실 전도사님도 함께 가실 겁니다”
 나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조 전도사의 결정에 모두가 나와 같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단 내 일부는 ‘조 전도사가 너무 어리다. 너무 거만하다. 신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너무 강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경건한 사람들도 판단을 잘못내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조 전도사는 나와 함께 서대문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조 전도사는 곧 교단 가입을 신청하였고, 다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그의 비전도 함께 커져갔다. 그는 종종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이끌어 가실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하루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함께 방문하였다. 그 교회는 예배를 여러 번 드렸고, 1만 명 가까운 등록교인이 있었다. 텅 빈 성전을 조 전도사는 미터로, 나는 야드로 재었다. 우리가 더욱 놀란 것은 우리의 새 성전이 더 넓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의 마음에 심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 비전에 함께 협력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일은 우리를 흥분케 하였다. 이때 나는 나의 역할이 조 전도사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소명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새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우리는 공사현장 옆 공터를 빌렸다. 우리는 대조동의 천막을 가져와 그곳에 치고는 연속 부흥회를 가졌다. 대조동에서 우리를 따라온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선교사 숙소에 교회를 세운 존 스텟츠 선교사와 함께 남기로 하였다.
 우리는 3주에 걸쳐 아침과 저녁에 공터에 세운 천막에서 부흥회를 가졌다. 아침에는 나와 조 전도사가 번갈아 설교를 하였고, 저녁에는 초청 강사인 샘 토드 부흥사가 조 전도사의 통역으로 성회를 인도했다.
 부흥회 첫날에 이미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막에 몰려왔다. 매일 수십 명이 회심을 하고 병고침을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체험했다. 우리가 교회를 헌당하기 전, 최자실 전도사와 18명의 여성도들은 주위 1천여 가구를 방문하며 앞으로 있을 헌당예배에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1961년 10월 15일 오후 1천 5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성전에서 헌당 예배를 드렸다. 3천명의 성도들이 사방에서 혼잡한 서대문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성전은 물론, 공터에 세워두고 부흥회를 하였던 천막까지 차고 넘쳤다. 연사로는 당시 문교부 장관, 국회 부의장 윤채영 박사, 퇴역 합참의장 정달빈 장군이 초청되었다. 1961년 12월 24일자 ‘Pentecostal Evangel(오순절 소식)’지에는 서울 부흥센터의 헌당이 89면에 수록되었다. 모두 서대문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는 우리의 꿈에 함께 하는 듯 보였다.
 저녁 예배에 더 많은 성도가 몰려들었다. 한 여인은 걸을 수 없어 양손과 무릎으로 시내에서 새 성전까지 기어와 통로에 누워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여인은 조 전도사와 내가 말씀을 전할 때, 마비된 근육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신유 기도가 끝날 무렵, 껑충 뛰고 마음대로 걸으며 팔을 흔들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였다. 그날 밤 거의 2백명이 거듭났고, 1백명 이상이 치유를 받았다.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이 처음부터 그곳에 흐르고 있었다.

지혜의 사람, 조용기 전도사

 처음 교회의 담임은 내가 맡았고, 조 전도사는 협력 사역자로 일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은 조 전도사가 목회를 위한 교단 목사안수를 아직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어에 유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 전도사가 사역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였고 최자실 전도사가 협력하였다.
 처음 우리는 교회이름을 순복음부흥센터라고 불렀고, 얼마 후 5백명 정도 수용할 발코니를 추가로 지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 천막 부흥회처럼 드렸지만 항상 더 영원한 장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로 나와 조 전도사가 말씀을 전했지만, 더 많은 성도가 모이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 외부 강사도 초빙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 중 여러 사람이 부흥센터를 원래 교회처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뿐 아니라 조 전도사도 내게 남녀 집사를 세우길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망설였다. 때때로 미국교회의 집사회의 경우 집단의 힘이 생겨 목회자와 회중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집사들은 상당히 사업적인 반면 진정한 영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그들로 인해 문제가 생겼었고, 나는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 전도사는 내가 주저하는 이유를 알고는 증가 추세 이던 노동자 평신도 모임에 와달라고 하였다. 나는 조 전도사가 섬김의 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보고, 사역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서로 섬기기를 격려하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신실한 마음으로 성전안내, 주일학교 봉사 등을 하였으며, 많은 시간을 내어 병자와 초신자를 위한 심방을 도왔다. 그곳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다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내가 미국에서 본 몇몇 집사들과는 달리 남들을 섬기고 봉사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조 전도사가 집사로 임명하고 싶어하는 성도들이었다. 그 신실한 모임 가운데서 나는 조 전도사가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계속>

 

기사입력 : 2003.06.21. am 09:18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