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전도사의 입대, 천막교회 맡게 돼
조 전도사의 입영과 천막교회
내가 다음에 조용기 전도사를 본 것은 초봄이었다. 우리들은 부흥회를 갖고, 부산항으로 보낸 짐을 기다리면서 몇 달간 부산에 머물렀었다.
조 전도사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곧 입대하여 2년간 복무하라는 입영통지서가 온 것이었다. 조 전도사는 한창 늘어나는 성도를 걱정하였다. 최자실 전도사 혼자 하기에는 너무 힘든 사역이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조 전도사는 자신이 군대에 있는 동안 최 전도사와 함께 천막교회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조 전도사를 안심시켰다.
우리가 새 가구들을 서울로 가져오자, 최자실 전도사는 천막교회의 몇몇 젊은이들을 데리고 와서 천막교회 옆 선교사숙소에 있던 우리의 이동주택을 위해 슬라브를 쳐주었다.
맥신과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천막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회 후에 30분간 머무르며 더 기도를 하거나 최 전도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머지 시간은 최 전도사와 함께 축호전도와 심방을 하였다. 이따금 시멘트 블록으로 된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판잣집이었다. 어디를 가든 전한 메시지는 똑같았다. ‘구원하고 병 고치고 복을 주고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내용이었다.
최 전도사와 성도들은 조 전도사가 어떻게 하든 병역을 빨리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분명한 말씀을 해주셨다. 조용기 전도사가 7개월 만에 군대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최 전도사에게 이 말을 전하자, 씩 웃기만 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조 전도사를 면회하였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의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를 곧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우리는 조 전도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나는 서울 국군통합병원 마루 위 요에서 자고 있는 조 전도사를 보게 되었다. 다음에 찾아갔을 때, 나는 간이 침대와 함께 매트릭스를 가져갔다.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를 조기 제대를 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 동안만이라도 조 전도사를 가능한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조 전도사가 군에 있는 동안,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미국에서 커다란 새 천막을 가져와 시장 가까이 펼친 뒤 부흥회 광고를 하였다. 성령께 집중하며 설교하였지만, 조 전도사가 너무나 아쉬웠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지금까지 만난 통역자 중에 가장 형편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나는 하나님은 통역자로 인해 제한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에도 그토록 통역을 못하는 통역자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렇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기간 부흥회 아침집회에서 너무나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나머지, 나는 그만 내가 혹시 한국의 오순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8백명 가까이되는 회중이 기도할 때 그 옆을 지나가자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의 강권하심이었다.
시장에서의 부흥회를 마치고, 우리는 이전의 낡은 천막을 거두고 근처 언덕 꼭대기에 새 천막을 쳤다. 얼마 후, 천막교회 성도수는 6백명이 되었다.
사랑과 비전과 지혜의 사람, 조용기 목사와의 만남
군에 입대한지 7개월 후, 조용기 전도사는 병원의 진단에 따라 제대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식언치 않으셨고, 나중에는 피가 나던 치질도 고쳐주셨다. 그가 돌아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막교회 외에도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1천5백명이 앉을 수 있는 조립식 건물을 매입하기 위한 모금을 하였다. 젊은 조용기 전도사가 군대에 있는 동안, 나는 최자실 전도사와 함께 천막교회 사역을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서대문 중앙에 좀더 가까운 선교부지에 ‘글로벌 컹퀘스트(Global Conquest: 세계 정복)’교회를 짓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엄청난 일을 행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베리아에서도 바울의 신약 성경적 패턴이 오늘날까지 통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중요도시에 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향을 그 나라에 확산시킨다.
조 전도사에 대한 나의 신뢰와 존경은 매일 매일 깊어만 갔다. 천막교회의 한 성도를 심방했을 때 일이다. 그 성도는 어느 추운 겨울날 조 전도사가 쌀가마니를 두른 채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조용기 전도사는 그 천막교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있었고, 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것들로 채워주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를 존중하고자 하였다.
성도를 사랑하는 사역자, 조용기 전도사
제대한지 얼마 안되어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성회로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고 하였다.
조 전도사는 교단정치에 환멸을 느낀 터라, 다시 교단 일에 간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어버리듯, 점잖이 고개를 저었다. “선교사님, 그 문제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요청할 것이 더 있었던 나는 말을 이었다. “서대문에 조립식 건물을 짓고 있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다네. 나는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가 나와 함께 새로운 곳에서 사역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또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가 장차 서대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느끼고 있다네. 교단으로 복귀를 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네”
하지만 조 전도사가 더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선교관을 말해주겠네. 나는 선교사란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발판이나 비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일단 건물이 세워지고 모든 마감이 끝나며, 발판과 비계는 뜯어서 다시 다른 곳에서 사용을 하지. 일단 교회가 세워지면, 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네.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한국사람이 맡아야 하는 것이야”
조 전도사는 내 말이 동의하였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선교사님과 서대문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는 대조동에 있는 자신의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서대문으로 가는 장거리의 비싼 버스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날 오후에 헤어진 나는 기도하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속>